사라잔마이 감상



0. 철학사에서 가장 위대한 업적을 남긴 카뮈는 <시지프스의 신화>의 첫 문장을 이렇게 시작하고 있다.
"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 뿐이다. 그것은 바로 자살이다. 인생이 살 만한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를 판단하는 것이야말로 철학의 근본 문제에 대답하는 것이다."

1. 왜 살아야 하는가? 라는 문제를 <시지프스의 신화>에서 알베르 카뮈는 제시한다. 공교롭게도, 2019년에 나온 두 개의 작품과 2020년에 나올 하나의 작품이 카뮈의 문제에 개별적으로, 그리고 굉장히 독창적으로 대답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전자의 두 작품은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과 이쿠하라 쿠니히코 감독의 사라잔마이고, 후자의 작품은 안노 히데아키 감독의 작품 에반게리온이다. 이제 세 가지의 작품이 원래 질문에 어떻게 대답하는지를 살펴보기 위해서, 우리는 작품의 표면적인 의미가 아니라 심층에 내재하고 있는 의미를 잘 구분해야 한다. 작품 이해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표면에 드러난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중요할 때도 있기는 하더라도, 심층에 초월적으로 존재하는 의미를 잘 소화하고 이해하는 것이며, 그것이 작품에 대해 이야기할 때 우리가 이뤄낼 수 있는 거의 모든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천만 관객을 향해 다가서고 있는 봉준호의 <기생충>은 트위터 등의 SNS에서 가난을 혐오하고 있다는 거센 비난을 받았다. 그런 거센 비난 속에서도 기생충에 대한 평가가 "잘 만든 작품", "웰메이드"라는 찬사를 듣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한 가지 시사점을 안겨 준다. 바로 어쩌면 기생충이 노린 것이 사람들이 말하는 좋은 평가가 아니라 비난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우리는 기생충을 올바르게 비판하기 위해서 문제를 해체할 필요가 있다. 묘사된 가난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왜 살아야 하는가?"에 대답하는 봉준호의 방식을 자세히 살펴 보자.

기생충에서, 주인공인 기우가 박사장의 저택 지하에 숨어 있는 아버지를 지켜보면서 나중에 "성공한 뒤에" 집을 사서 그를 해방시켜 드리겠다고 이야기하는 장면은, 봉준호가 "왜 살아야 하는가?"라는 문제에 부정적인 방식으로 대답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봉준호에게 있어 "살아갈 이유가 있는가?"라는 문제는 "우리들은 평등한가"라는 문제와 동일하고, 우리들은 실은 평등하지 않기 때문에 처음의 문제가 제기했던 삶의 중요한 문제는, 단지 사소한 가짜 문제가 되고 만다. 그는 영화의 현란한 연출과 장르라는 가면 속에서 중요한 문제를 회피하고 있다. 이것이 그의 영화에 대한 비판적 시선의 출발점이 되지만, 사람들이 겨냥하는 비판의 지점은 봉준호가 실제로 영화 속에서 저지르고 있는 실패나 오류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봉준호에게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는 무해한 지점에 대한 이야기로 소비되고 만다.

    


2. 한편으로, 기우에게 어떠한 희망도 주지 않고 저주를 걸고 있는 기생충의 냉정한 진보적 의식과는 다르게 에반게리온은 작중에서 대놓고 "이런 세상에서는 살아갈 이유가 없다"고 대답한다. 이는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EOE)의 포스터에서 "그러니까 모두 죽어버리면 좋을 텐데", "그러면 너는 왜 여기에 있는 거야? 여기에 있어도 돼?"라는 메시지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안노 히데아키는 카뮈의 "살아갈 이유가 있는가?"라는 질문에 그런 이유가 애초에 없었다고 대답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보다 나쁜 점이 있다면, 에반게리온이라는 작품으로써 살아갈 이유가 없는 사람들을 착취하고 있는 감독의 방식이다.

안노 히데아키는 2007년에 <에반게리온: 서>와 이후 작품인 <에반게리온: 파>를 통해서 기존의 에반게리온과는 다른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 보통 에반게리온 신극장판(신극장판)이라고 불리는 새 에반게리온은, 전작의 구 에반게리온처럼 명확한 주제 의식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의 인기를 끌고 있다. 안노 히데아키는 불분명한 이미지를 경유해서 아직 자아와 세계관이 정립되지 않은 사람들을 자신의 새로운 세계로 끌어들이고, 이를 통해 막대한 부를 획득한다. 이는 나의 대답(삶에는 이유가 없다)이 절대적으로 옳다는 확신이 없으면 할 수 없는 일이고, 에반게리온의 팬은 이러한 안노의 시선에 암묵적으로 동의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라캉이 말했던 "아버지가 사라진 뒤에는 언제나 더 나쁜 아버지가 찾아온다"라는 말은, 미야자키 하야오와 그의 아들 취급을 공공연히 받고 있는 안노 히데아키의 경우에 완벽하게 적용되는 것처럼 보인다.

3. 이처럼 많은 사람들의 평가를 받고 상까지 받은(기생충은 황금종려상을 받았고 에반게리온은 일본 국내에서 유수의 상을 휩쓸었다) 작품이 일관되게 냉정한 진보적 의식냉정한 우파 의식을 현현하면서 사람들의 존엄을 훼손하고 있다면, 이쿠하라 쿠니히코 감독의 TV 애니메이션 시리즈 사라잔마이는 위의 (악명 높은) 두 개의 작품과는 사뭇 다른 대답을 제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기생충이 대답한 "여기는 지옥이다"라는 무력한 선언과, 에반게리온이 대답한 "삶의 이유가 없는 세상에서 살아간다. 그리고 책임은 오로지 나에게 귀속된다"는 승리하지 않은 정신승리를 보면 분명히도, 카뮈가 원래 제기했던 질문이 쉽게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며 질문에 대한 대답이 나이브하면 안 된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오히려, 사라잔마이는 카뮈의 딜레마를 영리하게 회피한다. 사라잔마이에서 제시되는 메인 딜레마는 주인공인 쿠지 토오이가 가족인 형을 따를 것인가, 아니라면 축구를 같이 한 적이 있는 캇파 친구들인 카즈키와 엔타를 따를 것인가이다. 한국이나 일본 사회가 나쁜 개인주의 혹은 천민 자본주의라고 불리는 이유를 간략하게 요약하면 전통적 공동체에서 따라야 하는 전통적인 가치를, 새로운 규범이 지배하고 있는 사회 속에서 억지로 적용하려고 애쓰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른 가치를 만들어야 하지만 어쩔 수 없이 가족을 사랑하고, 학연을 신경써야 하고, 같은 지역에서 태어난 사람에게 가산점을 부여해야만 한다. 이러한 딜레마는 나쁜 행위를 하면서 "나쁜 사람이 살아남는다"는 실로 자본주의 사회에 걸맞는 이유를 제시하는 쿠지의 형의 경우에 분명해진다. 쿠지는 가족을 사랑한다는 이유로 형의 범죄를 돕지만, 이것이 <아수라>의 결말처럼 모두가 죽고 죽이는 식의 지옥으로 귀결될 것은 자명하다.

그렇기에 이쿠하라 쿠니히코 감독은 새로운 세대(주인공들은 모두 고등학생이다)가 전통적 가치가 지배하는 나쁜 개인주의의 사회 속에서, 새로운 가치를 발명할 수 있는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제시하면서 희망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한다. 하지만 주의할 점이 있다. 언제나 희망은 성급하고, 철저하게 전통적인 가치를 파괴하지 않는 이상 좌절의 함정은 이야기의 주인공을 어둠에 빠뜨릴 수 있다는 것이다. 기생충의 기우가 "아버지를 수호한다"는 함정에 빠져 계급 사회가 걸고 있는 흑마법의 저주에 빠지거나, 에반게리온의 신지가 "아버지의 말을 듣는다"는 함정에 빠져 그 속에서 방약무인한 존재로 자라면서 정신승리의 세계를 멸망 속에 빠뜨리는 것처럼 말이다.

이제 사라잔마이의 마지막 장면은 우리에게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오는 듯하다. 과거로 돌아가서 미상가(발찌)를 토스하는 어린 쿠지를 총으로 쏘는 쿠지와, 총알을 막으면서 희생하는 카즈키는 우리가 빠지는 모든 함정이 실은 문제--카뮈의 중요한 문제를 포함하여서--에 덜 빠지고, 덜 생각하였기 때문에 빠지는 함정이라는 사실을 암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살아갈 이유가 있는가?" 라는 문제가 쉽게 해결될 수 없는 문제라는 점은 확실하다. 그러나, 이런 문제를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 인간의 정신은 다른 사람에게 어쩌면 살아갈 이유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준다. 비록 모든 과거의 인연이 사라진 현실이라고 하더라도, 구치소에서 나오는 한 사람의 가엾은 소년에게는 희망이 있다. 그런 말을 믿거나 믿지 않거나, 사라잔마이의 결말에서는 쉽사리 지울 수 없는 어떠한 숭고함이 느껴진다. 정확한 말로 묘사하기는 어렵지만, 거기에 아름답게 빛나고 있는 숭고함의 정체는 무엇일까?

거기에 이쿠하라 감독은 이렇게 대답한다. 토오이, 엔타, 카즈키에게는 "미래"가 있다고. 미래로 나아갈 일만 남아 있다고.

(2019. 6. 26.)







덧글

  • ㅅㅂ 2019/06/26 20:50 #

    “사람들의 존엄을 훼손”..팽개쳐진 이정은이 분한 역할..기생충 관해서는 말할수 없는 모멸을 느끼거나 거리를 두면서 재미를 느끼는 두 반응으로 수렴되고 있더군요. 이 글처럼 저도 말로 해보고 싶은데..
  • 2019/06/26 21:22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2019/06/26 22:11 #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9/06/26 22:13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로그인 사용자만 덧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