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조림과 디자인




모든 문장들은 친한 작가들과 함께 홍대에서 저녁을 먹으면서 시작되었다. 홍대 근처의 한 훠궈 전문점에서 나와 작가 두 분, 이렇게 총 세 명이 훠궈를 먹으면서 즐겁게 대화를 나누었다. 한 분이 소설을 출판한다는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모 출판사가 일을 처리하는 방식이 좋지 않다는 이야기를 했고, 다른 분이 모 출판사가 사이트를 운영하는 방식에 대해 덧붙였다. 우리는 모 출판사라면 그럴 법하다면서 출판사에 대한 뒷담화 아닌 뒷담화를 했다. 당시만 하더라도 나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별다른 생각이 들지 않았는데, 사실 그 이야기는 모두가 아는 바를 공공연하게 말한 데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술을 마시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생각의 단초라고 할 만한 작은 아이디어가 떠올랐고, 그 후로 며칠간 목이 아파 집에서 골골대면서 작은 아이디어 위로 생각의 살을 하나씩 덧붙여 나갔다. 나중에 생각해 보면 아주 작은 차이일 수도 있지만, 실제 사람들의 삶을 지배하는 게 물질적인 조건이 아니라 오히려 정신의 조건이라면, 그리고 그게 사실이라면 작은 차이는 더 이상 작은 차이가 아닐 것이다.

아직 살아 있는 이어령이, 아직 살아 있는 김승옥이 소설을 쓸 의지가 없다는 걸 확인하고는 강제로 호텔에 묵게 만들면서 단편소설을 쓰게 만들었고, 그 위대한 소설의 제목이 서울의 달빛 0장이라는 일화는 한국 문학을 공부한 사람이라면 알고 있는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보통 이 이야기에서 교훈을 한 가지 뽑아보라고 하면 사람들은 "통조림을 하면 작가의 능률이 비약적으로 올라간다"는 단순한 교훈을 말할 것이다. 사실 그 이상으로 과거의 통조림 문화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없겠으나, 나는 조금 다르게 접근하고 싶다. 어떤 식이냐면, 김승옥이라는 작가를 위해서라면 호텔에 그를 가둘 정도로 돈을 가지고 있는 출판사가, 스스로 돈을 부담해 가면서 좋은 호텔에 묵게 만들면서 기어코 소설을 완성시켰다는, 마치 산업 역군을 보는 것만 같은 스토리다.

이 소설의 결말은 김승옥의 소설이 이상 문학상을 받는 것으로 끝나니, 모두에게 있어(어쩌면 김승옥을 제외하고는) 해피 엔딩이라고 할 수 있다. 분명히도 김승옥은 통조림 당하기를 바라지 않았을 것이다. 김승옥은 오히려, 당시에 글을 쓰고 싶지 않았다고 고백하고 있으니 말이다. (현재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자, 글을 전혀 쓰지 않으면서 다자이 오사무 선집에 손을 대고 있는 작가의 모습을 보면, 나는 그의 말이 진심이라고 생각한다.) 이어령은 소설을 쓰기 싫어하는 김승옥을 억지로 끌어 내어서 마치 "꼬마비누 매끌이"에게 비누는 사람들을 위해 태어났다고 말하는 것처럼, 사람들을 위해서 글을 쓰라고 말하며 그를 호텔에 집어넣었다. 일본에서 통조림의 기술을 어깨 너머로 배운 이어령은 작가에게 통조림의 효과가 얼마나 큰지 잘 알고 있었다. 실제로, 김승옥은 그 뒤로 소설을 몇 편 더 쓰기도 했으니 그의 처방이 제대로 들어 맞았던 셈이다.

통조림이 작가에게 비인간적인 방법이라는 점을 차치하고 보게 되면, 현대의 출판사가 통조림을 하지 않는 것에서 우리는 몇 가지 달라진 흐름, 혹은 사실의 조건을 찾아볼 수 있다. 첫째, 현대의 출판사는 작가에게 많은 것을 기대하지 않는다. 둘째, 작가도 역시 출판사에게 많은 것을 기대하지 않으며, (이번 곽재식발 디자인 사건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오히려 출판사를 귀찮게 여긴다. 셋째, 강호의 도리가 땅에 떨어졌다. 가 아니라, 통조림을 해서라도 좋은 글을 뽑아내고자 하는 욕망이 작가와 출판사 둘 모두에서 사라졌다. 세 가지를 잘 조합하면 우리는 반짝이는 하나의 귀결을 손에 넣을 수 있다. 귀결은 다음과 같다; 이제 좋은 글을 원하는 독자가 없으니, 출판이라는 행위는 관청에서 주민등록등본이나 등기부 등본을 찍는 것처럼 의무적으로 그것을 원하는 소수의 시민을 위해 봉사하는 서비스 이상도 이하도 아니며, 시민조차도--이것이 가장 중요한데--공무원에게 기대하는 바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반짝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서운 귀결이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 이런 질문(혹은 한숨)은 과거에서 배우려는 의도가 없는 이상 의미가 없다. 의미를 상실해 버린 탄식은 천 원을 내고 뽑은 등본 앞에서 커다란 한숨을 쉬는 선량한 시민의 탄식과 다를 바가 없어진다. 우리는 비슷한 모습을 한국에서 대학에 입학하는 신입생의 모습에서 관찰할 수 있다. 학생은 입학금과 등록금을 내고 대학에 들어간다. 대학은 학생이 꾸준히 돈을 바치기를 바라기 때문에, 확실히 이 대학에 들어오겠다는 의사 표현을 원한다. 둘의 니즈가 만나는 장소에서 수시가 늘어나고 정시가 줄어든다. 왜냐면 정시는 수능이라는 60만 수험생을 1등부터 60만 등까지 나누는 상대평가에서 학생을 뽑아야 하므로, 역으로 학생의 입장에서는 반수를 해서라도 더 좋은 대학교에 가고 싶다는 욕망이 있기 때문이다. 예전처럼 공부를 해서 대학교에 들어가는 의미는 사라지고, 오직 대학에 들어가서 취직을 해야 한다는 생존을 지향하는 목적만이 남는다. 생존은 중요한데 왜냐면 생존은 동물로서의 인간에게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시베리아의 고기압처럼 냉정한 동어반복이다.

나는 작가들이 우리는 소설을 왜 쓰는가? 라고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동시에, 많은 작가들은 이 물음을 변기나 휴지통에 밀어넣고 그저 잊어버리는 것으로 삶을 견뎌내고 있다는 것을 받아들인다. 이미 모두가 모두를 믿지 않으며 그렇기에 문학이라는 대문자가 진짜 대문자로 기능하지 못하는 세상에서, 동시에 3만 불이라는 GDP가 대다수의 서민에게는 의미가 없는 숫자이며 차라리 최저임금을 제대로 받는 게 삶의 정언명령인 오늘의 시대에서, 출판사는 작가에게 통조림을 하지 않고 작가는 트위터를 이용해 디자이너를 간접적으로 비난하며 대학은 학생에게 성장과 입신양명을 기대하지 않으며, 모든 사건을 바라보는 시민이자 방관자는 활자에 관심이 없다. 기대가 없어지고 그 자리를 자본의 논리, 생존의 논리가 채우는 것이 선진국으로의 진입 조건이라면 그것만큼 가혹한 일이 없겠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앞으로도 사람들은 책을 읽지 않을 것이고 예전에 소설이 차지한 삶의 영역은 K-POP과, 인터넷 밈과 인스타그램과 홍카콜라 등의 유튜브 채널이 차지할 것이라는, 재판정의 나무 망치 소리와도 같은 사실이다.

p.s. 이어령이 최근에 중앙일보와 인터뷰를 했는데, 암을 발견했다고 한다. 얼마 남지 않은 생 행복하게 보내시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