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사와 인정

지난 달에 나는 박권일이 쓴 글을 읽었다. 박권일은 글에서 이런 맛깔난 묘사를 한다.
요즘 ‘고시 합격기’ 독서에 빠졌다. <다시 태어난다 해도 이 길을>, <어머니 아직 촛불을 끌 때가 아닙니다>, <정의의 월계관이 나를 기다리고>…. 사법시험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으나 내가 보기에 여전히 한국은 ‘고시의 나라’다. 읽을수록 확신이 든다. 근대 한국인의 정신적 동력을 이만큼 곡진한 민중서사로 풀어낸 텍스트는 드물다. ‘사시폐인’, ‘고시낭인’ 같은 말이 보여주듯 고시를 준비하다 망가진 사람들이 지나치게 많다. 왜 그렇게 많은 이들이 위험부담이 큰 길을 택했을까? 단순히 ‘입신출세욕’ 같은 단어로 이를 모두 설명할 수는 없다. 고시광풍의 배경엔 그런 것보다 훨씬 음울한 무언가가 자리하고 있다. 합격기에는 모종의 공통된 정서와 인식이 드러난다. 바로 억울함(resentment)과 몰사회성이다. 
그리고 박권일은 고시 수기를 분석함으로써 사회 현상에 대한 분석까지 나아간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글을 쓰지 않은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의 이름은 김선수였다.
저 글의 주인공은 최근 대법관 후보로 오르내리는 김선수 변호사다. 고시 합격기에서 독보적으로 빛나던 성찰적 지성은, 늘 사회적 약자의 편에 섰던 그의 삶으로 오롯이 증명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권일은 다음과 같이 지적함으로써, 한 개인의 독특성이 사회 자체를 바꾸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답은 명료하다. 한국 사회가 오랫동안 ‘개천용’ 타령을 하며 대다수의 존엄을 일상적으로 짓밟는 체제였기 때문이다. ‘개천용’이라는 말이 성행하는 사회는 극소수 ‘용’에게 특권을 몰아주는 사회이며, 노력의 동기가 탁월성의 추구에 있는 게 아니라 멸시의 공포에 있는 사회다. 그런 사회에서 인간은 대체로 함께 참담해져 버리는 것이다. 
박권일의 말은 틀릴 수 없을 정도로 옳다. 개천용 서사는 소수에게 특권을 몰아줌으로써 대다수의 존엄을 짓밟으며 묵살한다. 위와 같은 사회에서 인간이 참담해지기를 피하기란 불가능하다. 셰익스피어가 “Hell is empty and all the devils are here” (지옥은 비어 있으며 모든 악마는 여기에 있다) 라고 말할 때, 그가 현재의 한국을 보고 읊었는지 착각할 정도다.

한편으로 나는 TV 방송에서 이런저런 오락과 함께 정치인 후보들의 면면을 본다. 오락 프로그램에서는 과거에 유명했지만 이제는 예능인이 된 스포츠 스타가 나오고, 종편 프로에서는 변호사였지만 이제는 재판장이 아니라 카메라 너머의 대중을 향해 현란하게 말하는 변호사가 있다. 이들은 모두 과거에 무엇무엇을 했다는 훈장을 가지고 연예계에 입성한 것이다.

정치인 후보의 모습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이들 중에서는 하버드 대학을 졸업한 사람도 있고, 이런저런 직책을 그만두고 정치의 세계에 뛰어든 사람이 있으며, 그저 유명하기 때문에 당선 가능성이 높은 단체장의 후보도 있다. 유권자들이 투표장에서 “뽑을 사람이 없다”고 한숨을 내쉬는 것도 쉽게 이해가 된다.

예능이 정치가 되고 역으로 정치가 예능이 되는 일도 심각한 일이지만, 그보다 더 심각해 보이는 일은 직함이 있기 때문에 그 사람을 평가하고 인정하게 되는, 한 편의 거대한 이야기다. 대중이 선거 기간을 제외하면 정치의 문제에 큰 관심이 없다는 점을 이용해서 이들은 활개를 친다. 현실 정치의 문제가 심각하다고 모두가 한 마디씩 거들지만, 박권일이 묘사하듯 “노력의 동기가 탁월성의 추구에 있는 게 아니라 멸시의 공포에 있는 사회”에서, 진정으로 탁월한 사람을 만나기란 어려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