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drock



Bedrock을 한국어에 있는 적당한 단어로 번역하면 "기반", "기반암"이라는 뜻이 될 것이다. 철학에서 이 Bedrock이라는 말은 후기 비트겐슈타인이 <On Certainty>에서 언급하면서 유명세를 얻게 되었는데, 비트겐슈타인의 해석자이기도 한 존 맥도웰(John Mcdowell)은 삶의 형식을 구성하는 기반 명제의 존재를 개념적인 내용을 성립하게 만드는 것으로서 중요하게 생각한다. 이러한 사실에 대해서는 G. E. 무어가 가장 먼저 언급하였기 때문에 일반적으로는 "Moorean facts"라고 불리지만, 현재는 거의 일반 명사로 쓰이는 "무어의 사실"을 훨씬 더 구체화해서 철학 체계(의 성립 가능성)을 구축한 철학자는 바로 말년의 비트겐슈타인이다.

세한 철학적인 논의는 생략하고, 요즘 들어 나는 내가 일반 사람들과 전혀 다른 인간이라는 의식이 강해졌는데,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는 과연 내가 이 사회에 제대로 편입되어 있는 게 맞는 건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이번에 이름을 말할 수 없는 잡지에 짧은 서평을 기고하면서 비슷하게 느꼈지만, 내가 상식이라고 믿고 있던 몇 가지 가치들이 실은 일반 사람에게는 전혀 적용되지 않고, 역으로 그 사람들이 상식이라고 믿고 있는 가치를 내가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사실이, 만약 그게 참이라면, 어떤 의미에서는 나를 이루고 있는 몇 가지 중요한 믿음들의 기원을 발견하는 기회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철학의 기원>에서 가라타니 고진이 시사한 것처럼, 문제의 실마리는 전혀 다른 곳에서 찾을/찾아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런 이야기를 하는 것도 결국에는 나를 위해서라고 할 수 있다. 그저 무한에 가까운 시간을 소모하면서 아킬레스의 거북이는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한다고 엘레아의 제논은 주장했지만, 실제로 시간은 흐르며 철학을 공부하는 나는 뭔가를 배운다. 내가 철학을 공부하는 게 온전히 나를 위해서라면 공부의 목표는 나 자신이지, 다른 어떤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마찬가지로, 내가 비트겐슈타인을 읽으면서 느끼는 점이 있다면 그것은 오로지 비트겐슈타인의 목소리를 제대로 이해하는 데 목표가 있지, 비트겐슈타인의 문학적 경구를 멋대로 나의 삶에 적용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사실 이는 철학 공부의 딜레마이기도 하다. 나는 비트겐슈타인을 읽으면서 나의 인생을 생각한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의 인생에 대해 말하는 바가 없다. 비트겐슈타인이 자기 인생의 이야기만 했다면 그는 20세기의 위대한 철학자로 남지는 않았을 것이다.

러나 비트겐슈타인이 남들과는 다른 상식을 가지고 있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그는 면제 판정을 받았음에도 부유한 집안의 뒷배를 이용해서 무모하게 1차 세계대전의 한복판으로 뛰어들었고(추축국으로!) 자신의 스승인 러셀에게 "내 철학을 이해하지 못할 겁니다"라는 폭언을 하고, 게다가 말년에는 자신의 건강도 별로 좋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갑자기 영국의 어느 종합병원에서 자원봉사를 하면서 아픈 사람들을 돕기도 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비트겐슈타인의 삶을 위대한 삶으로 여기고, 경배하고, 그의 삶과 철학을 엮어 보려고 어떻게든 시도하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한때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이라는 이름을 소유하였던 사람은 정말로 위대한데, 그것은 그가 위대한 철학적 작업--철학적 탐구, 논고, 확실성에 대하여 등등--을 남겼기 때문인가? 아니면 자타의 모범이 되는 아름다운 삶을 살았기 때문인가?

트겐슈타인에게도 자신의 세계상을 정초하는 기반Bedrock이 되는 믿음이 있었을 것이다. 이 믿음은 다른 사람과는 전혀 다르지만, 바로 그렇다는 이유로 침묵을 지켜야 할 정도로 중요한 믿음이기도 했다. "내가 모르면 남들도 모를 것이라"는 식으로 표현되는, 상식이라는 말로 모든 이견을 짓누르고 묵살하는 초평면성이 지배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전혀 다른 상식을 가진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고민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