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끼-오리 그림과 적용의 문제



나무위키 "루트비히 요제프 요한 비트겐슈타인" 항목은 나무위키 치고도 꽤나 자세한 정보를 담고 있어서, 유익한 아티클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가운데 3.2.1.절에 철학적 탐구를 소개하는 구절에서, 각주에 문제가 있는 것 같아서 잠깐 설명을 덧붙이고자 한다. 해당하는 각주는 101번이고,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토끼-오리' 그림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해석은 모호하여 그 의미를 알기가 어려울 정도다. (중략) 시각인상의 전환에 대해 서술하기는 하지만 안 그래도 난삽한 문체를 구사하는 비트겐슈타인에 더해 2부는 비트겐슈타인 본인이 구성한 게 아니라 편집자들이 짜집기 한 것이므로 그 내용이 더욱 이해하기가 어렵다. 애당초 '토끼-오리' 그림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해석에 이해할 뭔가가 있는지조차 불분명하게 느껴질 정도로 '사람의 표정에 대한 인상'과 관련한 유비 외에는 무슨 말을 하는지 감조차 잡기 어렵고, 심지어 지루하게까지 느껴진다. 칼 포퍼가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탐구」 에 대해 '지루하다'고 평한 것도 이 2부와 관련해서 생각해볼 수 있다. 워낙에 '토끼-오리' 그림이 시각 인상의 상대성을 직관적으로 보여주는 그림으로 유명해 간간이 여기에 비중을 두는 해석이 있기는 하지만, 실제로 비트겐슈타인이 '토끼-오리' 그림에 그와 같은 비중을 두었다고 보기는 어려운 면이 있다.

철학적 탐구의 2부가 유고 관리인인 G. E. 앤스콤과 함께 편집자들이 구성하고 편집한 것은 맞지만, 그 수준이 "짜깁기"라고 말할 정도로 수준이 낮은 데다가 중구난방인 것은 아니다. 그리고 칼 포퍼의 코멘트는 일견 부당하게까지 느껴지는데, 왜냐면 칼 포퍼는 철학적으로, 그리고 현실적으로 비트겐슈타인과 대립하는 입장이기 때문이다. 자세한 이유는 해당 항목의 2.4.절에서 1946년 10월 26일의 내용을 참고하면 이해 가능하리라고 기대한다. 다만, 내가 설명을 덧붙일 문장은 맨 마지막 문장이다.
"실제로 비트겐슈타인이 '토끼-오리' 그림에 그와 같은 비중을 두었다고 보기는 어려운 면이 있다" 과연 그럴까? 전혀 아니다. 왜 아닌지 살펴보기로 하자.

우선,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탐구가 지향하는 철학적인 목표, 그리고 있는 그림을 명확히 이해할 필요가 있다. 철학적 탐구는 흔하게들 후기 비트겐슈타인이라고 말하는데, 그 이유는 비트겐슈타인이 1920년대 중반에 이탈리아 경제학자와 직관주의 수학자인 브라우어를 만난 이후로 철학의, 특히 언어철학에 대한 입장이 180도 바뀐다. 그래서 이 시기의 변화를 언어론적 전회(linguistic turn)라고 부른다. 전기 비트겐슈타인의 입장이, 물론 논란의 여지가 있기는 하지만, 주로 언어의 형식화와 "그림 이론"으로 말해지는 실재에 대한 일대일 대응론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후기의 입장은 언어의 실천적인 측면을 강조한다.

언어의 실천적인 측면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언어의 선험적인 차원(예를 들면 문법)을 인정하되, 언어 게임의 사용이 자의적일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내가 "콜라"라는 말을 두고 사이다를 가리킬 수 있다. 이 용법은 우리의 언어 게임 내부에서 통용되지 않지만, 예컨대 내가 궤변 동아리에서 "콜라"를 사이다를 가르키는 데 사용하는 말이라고 배웠다면, 이 동아리는 그러한 함축을 갖는 언어 게임을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바꿔 말해서 우리가 하는 말에는 두 가지 측면이 존재한다. 논리적인 측면은 언어의 사용을 제약할 수 있지만, 제약은 언어 게임의 다양성과 양립할 수 있다. 후자를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 언어의 실천적인 측면이다.

그러면 토끼-오리 그림이 중요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철학 탐구의 139-141번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139. When someone says the word "cube" to me, for example, I know what it means. But can the whole use of the word come before my mind, when I understand it in this way?
Well, but on the other hand isn't the meaning of the word also determined by this use ? And can these ways of determining meaning conflict? Can what we grasp in a flash accord with a use, fit or fail to fit it? And how can what is present to us in an instant, what comes before our mind in an instant, fit a use?
What really comes before our mind when we understand a word?— Isn't it something like a picture? Can't it be a picture?
Well, suppose that a picture does come before your mind when you hear the word "cube", say the drawing of a cube. In what sense can this picture fit or fail to fit a use of the word "cube"?—Perhaps you say: "It's quite simple;—if that picture occurs to me and I point to a triangular prism for instance, and say it is a cube, then this use of the word doesn't fit the picture."—But doesn't it fit? I have purposely so chosen the example that it is quite easy to imagine a method of projection according to which the picture does fit after all.
The picture of the cube did indeed suggest a certain use to us, but it was possible for me to use it differently.


김영건은 이렇게 요약하였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의 문장을 이해하는가? 그 진리조건을 이해하여야 하는 것인가? 즉 그것이 참이 되거나 거짓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이해해야 하는가? 아니다. 오히려 그 문장의 사용 방식을 이해하여야 한다. 마찬가지로 한 단어의 의미도 그것이 문장 안에서 사용되는 방식을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한 단어의 의미를 그 사용을 통해 이해한다는 것이 무엇인가? 우리는 그것을 단박에 아는가? 그 전체 사용이 내 머리 속에 단박에 떠오르는가? 우리 머리 속에 떠오르는 이 전체 사용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그림과 같은 것인가?"

140. Then what sort of mistake did I make; was it what we should like to express by saying: I should have thought the picture forced a particular use on me? How could I think that? What did I think? Is there such a thing as a picture, or something like a picture, that forces a particular application on us; so that my mistake lay in confusing one picture with another?—For we might also be inclined to express ourselves like this: we are at most under a psychological, not a logical, compulsion. And now it looks quite as if we knew of two kinds of case.
What was the effect of my argument? It called our attention to (reminded us of) the fact that there are other processes, besides the one we originally thought of, which we should sometimes be prepared to call "applying the picture of a cube". So our 'belief that the picture forced a particular application upon us' consisted in the fact that only the one case and no other occurred to us. "There is another solution as well" means: there is something else that I am also prepared to call a "solution"; to which I am prepared to apply such-and-such a picture, such-and-such an analogy, and so on.
What is essential is to see that the same thing can come before our minds when we hear the word and the application still be different. Has it the same meaning both times? I think we shall say not.

내가 무슨 실수를 저질렀을까? 그림이 특정한 사용을 강요했다고 말해야 할까? 아니라면 특정한 적용을? 그래서 나의 실수는, 한 그림을 다른 그림과 오해한 것이라고 말해야 할까? 그렇지 않다. 다시 인용하자면, "그러나 그것이 나에게 특정한 사용을 강요할 권리가 있는가? 이것은 논리적 강요와 심리적 강요를 혼동하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가 어떤 단어를 들을 때 우리 머리에 어떤 같은 것이 떠오를 수 있지만, 그것의 적용은 여전히 다를 수 있다."

141. Suppose, however, that not merely the picture of the cube, but also the method of projection comes before our mind?——How am I to imagine this?—Perhaps I see before me a schema shewing the method of projection: say a picture of two cubes connected by lines of projection.—But does this really get me any further? Can't I now imagine different applications of this schema too?——Well, yes, but then can't an application come before my mind~?—It can: only we need to get clearer about our application of this expression. Suppose I explain various methods of projection to someone so that he may go on to apply them; let us ask ourselves when we should say that the method that I intend comes before his mind.
Now clearly we accept two different kinds of criteria for this: on the one hand the picture (of whatever kind) that at some time or other comes before his mind; on the other, the application which—in the course of time—he makes of what he imagines. (And can't it be clearly seen here that it is absolutely inessential for the picture to exist in his imagination rather than as a drawing or model in front of him; or again as something that he himself constructs as a model?)
Can there be a collision between picture and application? There can, inasmuch as the picture makes us expect a different use, because people in general apply this picture like this.
I want to say: we have here a normal case, and abnormal cases.

141번의 논점은 분명하다. 우리의 머릿속에는 그림이 있다. 그 사실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림을 적용할 때 우리는 다른 방식으로 적용할 수 있다. 내 머릿속에 삼각형 프리즘이 떠오르고, 그 다음에 나는 이를 "큐브"라고 말한다. 하지만 여기서 그림과 단어가 맞지 않는 것(doesn't fit the picture)은 아니다. 조심할 것은, 비트겐슈타인이 "큐브"를 프리즘이라고 생각한 게 아니라는 점이다. 그는 큐브를 두고 우리가 생각하는 네모난 정육면체를 상상할 수 있다. 하지만 "큐브"의 용법이 한 가지가 아니므로, 결과적으로, 우리는 그림에 대한 다른 적용을 가지는 사람을 상상할 수 있는 셈이다. "우리는 그 그림으로 다른 사용을 기대할 수 있다."

다시 토끼-오리 그림으로 돌아오자. 야스트로우의 토끼-오리 그림은 토끼로도 보일 수 있고, 오리로도 보일 수 있는 2가지 가능성을 가진다. 비트겐슈타인은 토끼-오리 그림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짧게 언급한다.

And I must distinguish between the 'continuous seeing' of an aspect and the 'dawning' of an aspect.
The picture might have been shewn me, and I never have seen anything but a rabbit in it.
나는 상의 "계속적인 보임"과, 상의 "나타남"을 구분해야만 한다. 그림은 내게 보여질 수 있지만, 나는 거기서 단지 토끼밖에 보지 못한다.

상은 보인다. 상이 보인다는 것은 나의 머릿속에 어떤 그림이 떠오르는 것과 같다. 이 그림은 아직 언어적으로 표현되지 않았다. 그러나 상은 현현할 수 있으며, 이 현현을 우리는 언어적으로 표현할 수 있다. 혹은 그것을 말하는 언어 게임에 개입할 수 있다. 그림에 대한 적용은 이렇듯 언어를 매개로 해서 나타난다. 물론 이것이 토끼-오리 그림으로 비트겐슈타인이 설명하고자 했던 바의 전부는 아니라고 할지라도, 철학적 탐구 2부의 수수께끼 같은 구절을 이해하려는 시도에는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렇듯 탐구의 1부 내용과 밀접하게 이어져 있기 때문에, 토끼-오리 그림은 나무위키에서 서술하는 이상의 비중을 가진다고 말할 수 있다.

(2018. 2. 10.)



덧글

  • 전진하는 하프물범 2018/05/06 21:08 #

    제가 3~4년 전에 썼던 글이고.. 지금 보니 제가 보기에도 문제가 있어 보입니다(왜 저렇게 썼지?). 비판은 타당하고 삭제요청하도록 하겠습니다. 어차피 내다버린 자식 같은 문서고 마음 같아선 다 삭제해버리고 싶지만.. ㅡ 가보니 이미 삭제돼 있음
  • Barde 2018/05/06 21:26 #

    네네. 제가 글을 쓴 며칠 뒤에 누군가 삭제했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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