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범성, 요리사, 레시피



김영건의 이 글을 읽고 생각난 점들을 적어봄.

<해체되지 않는 그 긍정적 측면은 도대체 어떤 것인가? 그것은 그만큼 구속적인가? 필연적인가? 아니면 엄청난 규범성을 발휘하는가? 로티는 그것이 별로 구속적이라고 보지 않는다. 그 구속력에 대해서 생각할 시간에 차라리 새로운 어휘를 만들어내라고 말한다. 필연적이라는 것은 기껏해야 조건적이며, 따라서 우연적 합의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따라서 규범성도 사회적 합의 그 이상이 아니다. 이것이 아무 것도 좋다는 상대주의를 함축하는가? 퍼트남은 그렇다고 하지만, 로티는 코웃음 친다. 이것을 기질 차이로 규정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논의거리를 생략하는 것이리라.>

나는 로티의 생각에 기본적으로 동의한다. 삶의 긍정적인 측면은 구속적인가? 별로 구속력이 있는 것 같지 않아 보인다. 필연적인가? 조건적이며 따라서 우연적 합의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규범성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이 <삶의 형식>이라고 이야기할 때 그는 평범한 삶의 요소들이 가질 수 있는 (매우 강한) 을 이야기하고 있다. 하지만 그 힘을 표현할 때 비트겐슈타인은 은유로 도피하거나 침묵할 뿐이다.

아마 비트겐슈타인이 요리에 대해 잘 알았다면, 그는 이런 비유를 들었을지도 모른다. 상세한 내용은 달라지겠지만, 나는 이 비유가 평범함의 힘을 묘사하는 데 가장 정확하고 명료한 비유라고 생각한다.

두 요리사가 있다. 둘의 실력은 의심 없이 좋다고 가정하자. 한 사람은 정해진 레시피대로 요리를 만든다. 다른 사람은 정해진 레시피대로 요리를 만들지 않고 새 요리를 창조한다. 재료의 가짓수나 조합도 다르고, 조리하는 순서도 다르고, 조리의 개별 period마다 들어가는 시간도 다르다. 그러나 둘이 만든 요리는 똑같이 맛있다. 로티 식으로 표현하자면, 체계적 요리(레시피를 충실하게 따른)와 교화적 요리 사이에 어떠한 인식론적 우위도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들이 만든 요리를 먹고 맛있다고 말할 때 우리는 전혀 다른 식으로 이야기한다. 왜 그런가?

우선 첫 번째 요리사가 만든 요리를 먹을 때 우리는 안심한다. 내가 늘 먹어오던 맛을 느끼며, 그것이 이 자리에(그리고 내 입 속에) 있다는 사실에 깊은 안도감과 함께 감사함을 느낀다. 내가 요리를 먹었던 과거로 돌아간 느낌마저 든다. 그러나 두 번째 요리사가 만든 요리를 먹을 때 우리는 놀란다. 내가 늘 먹어오던 맛이 여기에는 없다. 그러나 맛있고, 불쾌하지 않고, 내가 알지 못하는 새로운 세계에 들어간 기분을 맛본다. 문자 그대로 우리는 그런 느낌을 얻는다. 그런데 이러한 느낌은 내가 만약 새로운 요리만 먹어왔을 때는 경험할 수 없던 것이다. 새로움과 익숙함의 구분이 사라질 때 우리는 새로움을 새로움으로 느끼지 못한다. 여기에 <삶의 형식>이 가진 거대한 힘이 자리한다.

때로 우리는 익숙한 요리를 먹고 과거로 돌아간 느낌이 든다. 프루스트가 묘사한 것처럼 과거가 나를 부르는 느낌을 받는다. 그리고 우리가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세 번째 요리사가 등장한다. 그는 익숙한 재료를 사용해 복잡한 레시피를 구사하지 않고, 기존의 레시피를 빌리면서 전혀 다른 요리를 만든다. 우리는 이번에 진정으로 놀라는데, 그 이유는 평범함과 친숙함 사이에서 새로움이 구현되어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가 더욱 놀라는 이유는 앞의 경험을 되짚어보았을 때 제법 분명해 보인다. 그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기존의 레시피가 가진 이 새로운 맛을 극대화시켰기 때문이다.

규범성이 사회적 합의 이상이 아니라고 했을 때 로티는, 바로 이 지점에서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교정 불가능한 실수라고 볼 이유는 없다. 그에게는 세 번째 요리사가 등장하지 않았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