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연성과 우연성



<그에 반해 크립키는 선험성은 인식론적인 것으로, 필연성은 형이상학적인 것으로 분명히 구분하고, 이러한 토대위에서 우리의 문장을 성립시키는 명명(naming)의 구조를 분석하고 그리하여 선험성과 필연성의 독립성을 해명한다.

우선 크립키가 제시하는 우연과 필연의 구분을 보면 다음과 같다.

"어떤 것이 거짓이라면 분명히 그것은 필연적으로 참이 아니다. 그것이 참이라면 그것이 그렇지 않게 될 수도 있는가? 이런 관점에서 세계가 현재 있는 방식과 다른 것일지도 모른다라는 것이 가능한가? 만약 그 대답이 '아니오'라면 세계에 대한 이 사실은 필연적인 사실이다. 만약 '그렇다'라면 세계에 대한 이 사실은 우연적 사실이다. 이것은 그 자체로는 어떤 것에 대한 누구의 인식과도 아무런 상관이 없다. 이것은 분명히 철학적인 테제다"(7)

크립키에 따르면 수학의 명제들, 예를들면 '2보다 큰 모든 짝수 n은 n보다 작은 두개의 솟수 p1과 p2의 합이다'와 같은 명제들은 그것이 참인지 거짓인지를 선험적으로 알 수는 없지만 그것이 참이라면 필연적으로 참이고 그것이 거짓이라면 필연적으로 거짓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필연성의 근거는 어디에 있는것인가? 크립키는 이름에 대한 특유의 해석을 통해서 이를 근거지운다. 크립키는 <고정지시어>와 <비고정지시어>를 나눈다. 고정지시어는 그것이 모든 가능세계에서 동일한 대상을 지시하는 것이고 비고정지시어 내지 우연적 지시어는 동일한 것을 지시하지 않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지시되는 대상이 모든 가능세계에 실제로 존재할 필요는 없다. 크립키가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가 사용하는 이름들 중에서 어떤 대상을 고정적으로 지시할 목적으로 도입되는 이름이 있다는 것이다. 이는 이름은 기술에 의해 도입된다고 하는 프레게나 러셀의 입장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것이다. 이름이나 사물을 순수히 질적으로 규정하려는 이러한 입장은 바로 인식적인 것과 형이상학적인 것, 그리고 선험적인 것과 필연적인 것을 혼동하는데서 기인하는 것이라고 크립키는 본다. 반사실적 상황들과 관련하여 일반적으로 사물들은 '발견되는'(find out) 것이 아니라 규정되는(stipulate) 것이다. 사물을 규정하는 우리의 정의, 예를들어 '시간t에서 막대기 S는 1미터이다.'와 같은 정의는 '1미터'라 부르는 것의 <의미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지시체를 고정>시키는 것이다.>


크립키에게 '필연'은 '지시체를 고정'시킬 때 성립한다. 즉, 고정 지시어(rigid designator)를 가지는 대상을 명제로 표현할 때 필연이 가려진다. 따라서 크립키에게는 경험적인 필연성도 가능하다. 다시 말하면,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2보다 큰 모든 짝수 n이 두 소수의 합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우리가 그것을 증명하기 전에는 참인지 거짓인지 알 수 없지만, 우리가 증명하기만 한다면 이는 참이거나 혹은 거짓이라는 말이다.

무엇이 이러한 주장을 가능하게 만드는가?

나는 크립키의 주장의 근거가 불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보자. 피타고라스가 직각삼각형의 세 변이 a^2+b^2=c^2이라는 피타고라스의 정리를 발견하지 '않은' 세계를 상상해 보자. 우리는 그런지 아닌지 모르고, 따라서 경험적으로 변의 제곱을 측정해 봤더니(방법은 여러 가지가 존재한다) 위의 결과가 나왔다. 그렇다면 이는 "경험적으로 필연적인" 명제인가? 우리가 경험하기 전에 저 문장을 참이나 거짓으로 인식할 어떤 근거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인가? 만약 그렇다면, 기하학을 '선험판단'이라고 말한 칸트가 거짓말을 한 셈이 된다.

칸트는 저 명제를 선험적으로(a priori) 우리가 알고 있다고 주장한다. 즉, a^2+b^2=c^2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경험적인 지식이 아니다. 이는 다른 정리를 말할 때도 마찬가지로 성립한다. 하지만 크립키에게 "a^2+b^2=c^2이 아닌 세계"도 반사실적 조건문으로 성립하기 때문에 이것도 경험적으로 필연적이다. 다시 말하면, 칸트는 "a^2+b^2=c^2이 아닌 세계"가 선험적으로 참일 수 없다고 주장할 것이다. 그러나 크립키는 그런 세계도 양상논리적으로 성립한다고 주장할 것이고, 따라서 경험적으로 참일 수 없다고 주장한다. 둘의 입장은 양립할 수 없어 보인다.

물론, 비유클리드 기하학에서 a^2+b^2은 c^2이 아니다. 그리고 세 변의 각합도 180도가 아니다. 곡률에 따라 각합이 달라진다. (구에서는 +180도, 오목한 면에서는 -180도) 크립키가 "지시체를 고정"시킨다고 말할 때, 그는 세 변을 "피타고라스 삼각형의 세 변"이라고 고정해서 지시하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이는 궁극적으로 기술구 문제에 대한 해답이 되지 못한다. 왜냐면, "피타고라스 삼각형의 세 변"이 모든 가능세계에서 동일한 대상을 지시한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피타고라스 삼각형의 세 변"이라는 고정 지시어가, 비유클리드적 가능세계의 세 변을 가리키는 이름이 되는 세계를 상상할 수 있다. 비유클리드 세계의 '피타고라스'는 삼각형의 세 변에 대한 새로운 정리를 발표한다. 이는 우리의 원 정리, 즉 a^2+b^2=c^2과는 거리가 있다. 둘은 같은 이름으로 서로 다른 대상을 가리킨다.

정리하자면 선험적인 필연성도 경험적인 필연성도 '필연성'의 조건을 충족한다고 보기 어렵다. 논리적으로 필연값이 0 또는 1이고, 우연값이 0과 1 사이라고 생각했을 때, 크립키의 필연값은 0 또는 1이 아닐 수 있다. 다시 말해, 크립키의 '고정 지시어'는 우연성과 필연성에 대한 해답이 될 수 없다. 우리는 전혀 다른 측면에서 이 문제를 접근해야 한다.



덧글

  • 전진하는 하프물범 2018/05/07 04:37 #

    크립키를 읽은 게 꽤 옛날이라 정확하다고 장담할 수는 없지만 제가 기억하기론 1. 선험명제(내지는 필연명제)인 줄 알았던 무엇이 후에 그렇지 않은 다른 명제로 판단된다고 해도(말씀하신 칸트와 크립키) 그것은 '인식의 문제'일뿐 그것이 선험-필연과 경험-필연의 구분을 무의미하게 하는 것은 아니다. 2. 크립키도 물론 가능세계에서 "물이 H20가 아니라 ABC인 경우"(물=H20는 크립키에 의하면 경험-필연명제인데, 가능세계에서 물=ABC인 경우, 이때 물의 원소적 필연성은 깨지는 게 아닌가? 하는 의문)나 현실세계에서 누군가 "25×25=625가 아니라 624이다. 우리는 이 곱셈만 예외로 하기로 했는데 모두 알 수 없는 태양광선에 정신을 잃어 이 규칙을 망각한 것이다." 따위의 경우를 상정합니다. 이때 전자의 경우, ABC인 물은 '사이비 물'이고, 후자의 경우, 25X25=624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정신이 이상한 사람'으로 결론 내립니다. 즉, 제기하신 문제, 피타고라스의 정리를 비롯한 기타 필연명제가 후에 우연명제로 판단된다면, 그건 '필연명제인 줄 알았던 것이 단지 우연명제로 판명난 것'(인식의 문제)이 되거나 가능세계에선 '사이비 피타고라스 정리'가 될겁니다(말씀하신 역사적 피타고라스가 피타고라스의 정리가 아닌 다른 정리를 말한 경우).3. 결과적으로 필연명제란 존재하지 않는 게 아닌가? 하는 의문.. 예컨대, 데카르트는 더 과격하게 "신은 2×2=4가 아닌 세계를 만들 수 있다."고 주장했지만, 이러한 세계가 경험될 수 있는가? 내지는 가능세계로서 존재하는가? 하는 문제는 이미 논리적 설득의 영역이 아닌 세계관의 문제라고 봅니다. 예컨대, 크립키는 한 사람의 통세계적 동일시의 기준으로 '같은 부모에게서 태어났을 것(유전적 동일성)'을 제시하는데.. 이를 받아들이는 철학자는 별로 없을 거라고 봅니다(가령, 불교에서는 사람이 동물, 심하면 사물로 환생한다고 주장하는데, 이러한 주장이 적어도 불교신자들에게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걸 보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립키의 생각은 일반적으로 세계를 이해하는 시야를 넓혀줘서.. 적어도 그 논리적 구분(선험-필연, 선험-우연, 경험-필연, 경험-우연으로 구분하는방법론)만큼은 형식적 타당성을 지닌다고 봅니다. 그 내용이 공허하냐, 무언가 채워져 있냐와는 별개로..

    철학 안 한지 오래라.. 적고 보니 이미 다 아실 거 같음..
  • Barde 2018/05/07 04:39 #

    안녕하세요. 누구신지 모르겠으나 제 글에 대한 자세한 논평 감사드립니다. 분석철학을 열심히 공부하신 분 같습니다.
    3번 문제에 대해서 생각하는 게 결국 필연성의 문제에 대해 핵심이 아닐까 싶습니다. 저는 데카르트의 직관에 동의하는 부분이 있는데, 다만 그와 같은 세계가 어떠한 세계인지에 대한 생각이 중요할 겁니다. 만약 그 세계가 대문자 "세계"로 성립할 가능성이 아예 없다면 우리가 그것에 대해 생각하는 일은 의미가 없는데, 이를 이해하는 데 현대 수학이 한 줌의 직관을 제공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guessing 정도만 가지고 있습니다.

    제가 예전에 수학을 공부해서 그런 생각을 할지도 모르지만요. 아무튼 다시 한번 코멘트 감사드립니다.
  • 전진하는 하프물범 2018/05/07 04:44 #

    호의가 생겨 이것저것 읽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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