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과 도덕



이 글을 읽으니 비트겐의 ‘언어 게임’ 개념과 사밀성(사적으로 접근 가능한 마음)에 대한 비판이 정말로 탁월하단 생각이 든다. 사밀한 마음이 존재하는가? 비트겐주의자의 대답은 노. 왜냐면 사적 언어는 언어화할 수 없고, 따라서 개념화도 불가능하고, 언어 게임 안에서 아무런 쓸모도 없기 때문. 그런 마음이 의미를 갖지 않기 때문에 후기 비트겐의 프레임 안에서 사밀성은 거부된다.

그러면 혼자서 윤리를 생각하면 그것도 무의미한가? 아님. 한계지은 언어의 끝에 가서 부딪치는 일은 우리에게 존경 혹은 고귀함 비슷한 느낌을 준다. 왜냐면 인간이 가장 고귀해지는 순간은, 다른 사람들이 하지 않는/못한 일을 하는 모습 그 자체에 현현하기 때문이다. 윤리는 언어 게임에 속하는가? 아닌 것 같음. 그러면 윤리는 사적 언어인가? 그것도 아닌 것 같음. 왜냐면 사적 언어는 언어게임 안에서 아무 역할도 하지 못하지만, 윤리적인 생각은 비록 언어화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우리에게 깨달음을 주는 효용을 가짐.

윤리는 세계-내 존재인 인간의 한계를 경계짓는다. 그래서 윤리가 중요하다. 때로 그 경계는 넓어질 수도 있고 좁아질 수도 있지만, 중요한 것은, 우리가—도덕률 따위가 아니라—윤리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때 말할 수 있는 어떤 영역이 급속하게 좁아진다는 것이다. 대체 칸트는 왜 도덕률을 주장했을까? 아마도, 동물과 비교했을 때 신을 믿는 인간을 특권적으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에. 하지만 비트겐에게 말해지는 세계는 ‘지구가 있다’는 명제에서부터 출발하니, 여기서 후행하는 존재인 인간에게 특권을 줄 이유가 없다.

왜 특권을 줘야만 할까? 그 이유는 특권을 주지 않으면 스미스나 흄의 도덕 감정에 호소할 수밖에 없기 때문. 동물은 인간과 마찬가지로 도덕 감정 비슷한 뭔가를 가진 것처럼 보이는데, 이를 덕원리로 삼는다는 건 프로테스탄트 신자인 칸트에게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칸트가 틀렸을까? 도덕률을 강제적 규범으로 보면 틀렸음. 하지만 ‘목적의 왕국’을 세우려는 규제적 이념으로 봤을 때 칸트는 여전히 유효하다. 동물에게 규제라는 개념은 존재하지 않지만(삶이 연속적일 뿐이지만), 인간에게는 삶의 단절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삶의 단절의 한 예를 들어보자. 예를 들면, 전쟁을 하고 각 나라는 다시는 전쟁을 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한다. 그리고 자유나 평등, 영구평화 같은 이념을 헌법에 새긴다. 이건 아무리 봐도 동물이 할 수는 없는 일이고, 따라서 도덕률을 규제적 이념으로 이해했을 경우 칸트를 구제할 수 있는 여지가 생긴다. 흄은 도덕 감정을 주장하면서 여기서 도덕이 가능하다고 주장하지만, 어떤 경우는 그렇지 않다고 칸트는 <실천이성비판>에서 주장하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난 이러한 칸트의 생각에 동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