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를 맞아




교토 애니메이션 제1스튜디오 방화로 돌아가신 타케모토 야스히로, 이시다 나오미, 니시야 후토시 등 36명 애니메이터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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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일이다. 올해는 저도 다른 사람들이 하는 것처럼 방명록을 만들겠습니다. 혹시 제게 전할 말이 있거나, 용건이 있거나, 아니면 일본어 번역 업무를 부탁할 경우에는, 이 글 밑에 댓글을 달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라인(lerisia)으로도 연락 가능합니다.

오늘의 음악: 아이묭 「벚꽃이 떨어지는 밤은」 (싱글), 나카무라 카호 「아이밀(aimiru)」






일기

영어 숙어 중에 떨어지는 칼을 잡는다(catching a falling knife)라는 말이 있다. 주식 시장에서 주가가 폭락하는 하락장이 왔을 때, 낮은 가격에 주식을 매수해서 가격이 다시 올라갈 것을 기대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만약 가장 낮은 가격에 주식을 살 수만 있다면 성공적이라고 할 수 있지만, 내가 생각한 가격이 가장 낮은 가격이 아니라 그 아래 심연이 있다면? 아니면 예를 들면, 오스템 임플란트처럼 우상향을 그리던 주식이 어느 순간 거래정지가 되고, 회사의 비리가 밝혀져서 상장 폐지의 위기에 처한다면 어떨까. 우리는 그 주식을 팔지 못한 것을 후회할 것이다. 이것은 정확히 아이돌과 버츄얼 유튜버에 대해서도 타당하게 말할 수 있는 일이다.

버츄얼 유튜버인 그녀를 I라고 해 보자. (I든 J든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니다. 아니지만, 나는 일부러 i를 골랐다.) 나는 I의 열성적인 팬이었지만 어느 시점에,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지만 2021년의 어느 달에 그녀를 손절했다. 우선 그녀의 계정을 언팔로우하고 마음을 찍었던 트윗을 지웠다. 시간이 지난 뒤에, 유튜브의 구독도 해지했다. 유튜브의 구독을 눌렀다가 다시 해지해버렸다. 그날 이후로 I의 소식은 타임라인에서도 전혀 들리지 않고, 타임라인 바깥에서도 들리지 않았다. I는 그렇게 인기가 많은 버츄얼 유튜버는 아니었다. (오히려 처음에는 그래서 I를 진심으로 지지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이제 I를 완전히 잊어버렸다고 생각했을 즈음, 사건이 터졌다. 그녀는 (우유)와 (이즈미)라는 뒷계정을 만들어서 유튜브 방송의 리스너들과 소통했다. 자신의 신체가 드러나는 여러 사진을 올렸다. 리스너들과 만나지만 않지 절친한 친구라고 할 정도로 가깝게 소통했다. 자신의 과거와 취향 이야기를 공개했다. 그렇게 그녀는 승인 욕구를 채워나갔다.

이런 사실을 처음 알았을 때는 솔직히 반신반의했다. I는 히키코모리 성향이 강한 성인 유튜버였고(일본 기준으로는 아직 미성년자였을 수도 있지만...), 공과 사를 구분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의혹이 사실로 밝혀졌을 때 나는 I가 완전히 멘헤라고 정신과의 치료가 필요한 약한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다. (이즈미) 이름으로 쓴 노트에서 그녀는 조울증을 앓고 있으며 거의 자살할 뻔한 적도 있다고 썼다. 다행히 자살을 하지는 않았지만 매우 위태로운 자아가 날것으로 드러난 글이었다. 그녀는 N이라는 대기업과 버츄얼 유튜버라는 직업에 걸맞지 않은 행동을 했고, 규약에 따르면 그녀는 계약을 해지해야만 했다. 하지만 N은 소동을 아는지 모르는지, I를 품고 간다는 선택을 했다.

2021년의 어느 시점에 I를 손절한다는 생각을 했을 때, 나는 그녀가 이상한 방향으로 가지 않기만을 바랐다. 한때 유명했던 I는 이제 신인 버츄얼 유튜버와 N사의 재능 있는 유튜버들에 밀려서 한두 사람에게 애정을 쏟는 리스너만 남은 상태가 되었다. 오래 전에 부여받은 I라는 멋진 캐릭터와 귀여운 목소리 등의 재능은 낭비되고, 주식은 걷잡을 수 없이 폭락했다. 나는 떨어지는 칼날을 잡지 않고 아예 VTuber를 보지 않겠다는 선택을 했다. T와 K의 은퇴로 인한 실망감도 컸던 것 같다. 하지만 가슴의 한켠에는 I의 재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었다. 처음 버츄얼 유튜버의 세계에 들어온 나의 눈에는, I가 찬란하게 빛나는 보석처럼 보였다. 에메랄드, 루비, 사파이어, 오팔이 있었다.

이제 그런 존재는 없다. 그녀가 앞으로 어떤 길을 나아갈지 모르겠다. 편협한 나의 시각으로는 예측이 불가능하다. 부디 N이라는 약육강식의 세계를 견디지 못하고 상장 폐지하는 일이 없기만을 바란다. 리스너와의 관계를 끊고 건강해지고, 햇빛을 보고, 앞을 보고 나아갔으면 한다.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 잡감



말 그대로 잡감이다. 난 피아노 전문가도 아니고 연주자도 아니며, 그저 클래식을 좋아하는 팬일 뿐이라서 인상 비평을 넘어서는 글을 쓸 수는 없다.

개인적으로 이번 18회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는 17회와 비교하면 공정성이 (매우) 부족했다는 생각이 든다. 2차 예선에서 아무런 설명도 없이 광탈당한 우시다 토모하루의 연주는 수준급이었고, 그 대신에 올린 일본인 연주자가 하야토 스미노였다는 점에서 주최측의 속셈을 짐작하게 만들었다. (하야토 스미노는 구독자 80만 명을 가지고 있는 유튜버다. Cateen이라는 이름으로 활동 중) 각본대로였는지, 아니면 예상대로인지 모르겠지만 하야토 스미노는 파이널 무대에 올라가지 못하고 떨어졌다. 졌지만 잘 싸웠다 이런 느낌이었다. 만약 우시다가 3차까지 올라갔으면 파이널 무대에 올라갔을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왜냐하면, 1차와 2차에서 우시다가 보여준 연주가 수준급이었으니까. (한 가지 미스는 야마하 피아노를 골랐다는 것이다. 야마하의 그랜드 피아노는 고음이 너무 튈 때가 있는 것 같다. 몰아칠 때 바람처럼 몰아치는 우시다의 쇼팽 연주 스타일이라면 스타인웨이나 시게루 가와이를 고르는 편이 낫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좋은 피아노들 가운데에서도 야마하를 고른 근성만큼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실제로, 그랜드 야마하를 고른 참가자는 거의 없었다.)

유일하게 파이널 무대에 올라간 한국인 연주자 이혁(HYUK LEE)에 대해서는... 파이널 연주를 피아노 콘체르토 2번, Op. 21로 선택한 점이 심사위원들의 역린을 건드렸을 가능성도 있다. 왜냐하면 이혁의 콘체르토 2번 연주는 정확함과 정교함이 뒷받침된 엄격한 피아니즘보다는 오히려 감성에 호소하는 다른 의미에서 훌륭한 연주였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서 성진초가 2015년의 제17회 파이널 무대에서 콘체르토 1번을 연주했을 때는 미스터치가 정말로 하나도 없었다. (지금도 듣는 중) 이것은 당시 21세의 조성진이 정말 대단했던 것이고 솔직하게 말하면 파이널에 올라온 모든 피아니스트들의 연주를 들어 봐도 조성진'만큼' 잘 연주한 사람을 찾기 어려웠다. 콘체르토 1번을 연주한 사람 중에서는 소리타 쿄헤이(94년생)의 연주가 가장 마음에 들었지만, 역시 조성진의 연주와 비교하면 부족함이 많다. 다만 노파심에서 첨언하자면 이 정도 레벨에서 소리타 쿄헤이님이 조성진보다 연주를 못 했기 때문에 그가 조성진보다 좋은 연주자가 아니라는 식으로 말하는 건 의미값이 없는 말이다. 아무튼 조성진보다 좋은 '연주'가 없었기 때문에 심사위원도 고민의 시간을 몇 시간이나 늘려가면서 최종 우승자를 뽑았지 않았나, 뭐 그런 생각이 든다. 마지막에 끼워놓은 연주자들 토크는 대체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고... Too much한 정보들이 많았다. 천장 바라보기를 좋아한다거나 이혁을 체스로 이긴 사람이 없었다거나 비행기 수속 시간에 늦어서 김포에서 인천으로 갔다거나 (아니 그래서 어쩌라고요? 문제는 그걸 보고 있던 사람이 5만 명이나 되었다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튼간에... 이번 쇼팽 콩쿠르도 볼거리 즐길거리가 다양하였다. 심사위원들이 그렇게 명백한 의도를 가지고서 누구를 떨어뜨리고 자신의 제자를 붙여주고 하는 것도 막장드라마에 가까운 재미가 있었다. 세상이 공정하지 못할수록 더 재미있고 아저씨들의 술자리 안주를 늘려준다는 점은 대한민국의 정치가 이미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물론 대한민국의 정당 정치에서 어떠한 윤리적인 가치나 미적인 가치를 발견해 낼 수 없다는 점은 콩쿠르와 정치의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을 듯하다. 개인적으로 연주자들에게 바라는 것이 있다면, 우시다 토모하루는 피아노를 바꿔서 다음 쇼팽 콩쿠르에 꼭 나와줬으면 좋겠고 이혁은 이미 파이널까지 올라갔으니 쇼팽 콩쿠르 재수를 하기보다는 다른 콩쿠르에서 얼굴을 볼 수 있다면 좋겠다. 그리고 소리타 쿄헤이와 고바야시 아이미는 피아니스트 커플이 되었으면 좋겠다. (본인의 헛소리입니다) 나도 이번 기회에 쇼팽의 명연주 명음반을 찾아서 들어볼 거다. 하지만 나는 쇼팽보다 모차르트를 훨씬 더 좋아한다. 유일하게 구매한 조성진의 음반도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이다. (DG) 매우 즐거운, 행복한 시간을 보냈으니 이제는 우리가 헤어져야 할 시간, 다음에 또 만나요, 이렇게 또 다시 4년을 기다리면 제19회 콩쿠르가 찾아올 것이다. 위대한 피아니스트의 연주를 홀에서 듣기 위해서라도 오래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해 본다.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상윳타니까야

어느 때 부처님께서 사위국을 유행하실 적에 승림급고독원(勝林給孤獨園)에 계셨다. 그 때 존자 만동자(鬘童子)는 혼자 편안하고 고요한 곳에서 연좌(燕座)하고 사색하다가 마음으로 이렇게 생각하였다.

“이 세상은 영원한가, 이 세상은 영원하지 않은가? 세상은 끝이 있는가, 세상은 끝이 없는가? 목숨이 곧 몸인가, 목숨과 몸은 다른가? 여래는 마침이 있는가, 여래는 마침이 없는가, 여래는 마침이 있기도 하고 마침이 없기도 한가, 여래는 마침이 있지도 않고 마침이 없지도 않는가? 세존께서는 이런 소견들은 다 제쳐놓고 전혀 말씀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원하지 않고, 나는 그것을 참을 수 없으며, 나는 그것을 옳게 여기지 않는다. 만일 세존께서 나를 위하여 ‘세상은 영원하다’라고 분명히 말씀해 주신다면 나는 그 분을 따라 범행을 배우리라. 그러나 만일 세존께서 나를 위하여 ‘세상은 영원하다’라고 분명히 말씀해 주지 않으신다면 나는 그를 힐난한 뒤에 그를 버리고 떠나리라. ‘세상은 영원하지 않은가? 세상은 끝이 있는가, 세상은 끝이 없는가? 목숨이 곧 몸인가, 목숨과 몸은 다른가? 여래는 마침이 있는가, 여래는 마침이 없는가, 여래는 마침이 있기도 하고 마침이 없기도 한가, 여래는 마침이 있지도 않고 마침이 없지도 않는가?’라는 견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만일 세존께서 나를 위하여 ‘이것은 진실이요 다른 것은 다 허망한 말이다’라고 분명히 말씀해 주신다면, 나는 그분을 따라 범행을 배우리라. 그러나 만일 세존께서 나를 위하여 ‘이것은 진실이요 다른 것은 다 허망한 말이다’라고 분명히 말씀해 주지 않으신다면, 나는 그를 힐난한 뒤에 그를 버리고 떠나리라.”

존자 만동자는 해질 무렵에 연좌에서 일어나 부처님께 나아가 머리를 조아려 예배하고 물러나 한쪽에 앉아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저는 오늘 혼자 편안하고 고요한 곳에서 연좌하고 깊이 사색에 잠겼다가 마음으로 이렇게 생각하였습니다. ‘이 세상은 영원한가, 이 세상은 영원하지 않은가? 세상은 끝이 있는가, 세상은 끝이 없는가? 목숨이 곧 몸인가, 목숨과 몸은 다른가? 여래는 마침이 있는가, 여래는 마침이 없는가, 여래는 마침이 있기도 하고 마침이 없기도 한가, 여래는 마침이 있지도 않고 마침이 없지도 않는가? 세존께서는 이러한 견해에 대해서는 다 제쳐놓고 전혀 말씀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저는 그것을 원하지 않고 저는 그것을 참을 수 없으며 저는 그것을 옳게 여기지 않습니다. 만일 세존께서 분명하게 ‘세상은 영원하다’고 알고 계신다면 세존이시여, 저를 위하여 말씀하여 주소서. 만일 세존께서 ‘세상은 영원한가’에 대해 분명하게 알지 못하신다면 ‘나는 모른다’고 정직하게 말씀하여 주소서. 이와 같이 ‘세상은 영원하지 않은가? 세상은 끝이 있는가, 세상은 끝이 없는가? 목숨이 곧 몸인가, 목숨과 몸은 다른가? 여래는 마침이 있는가, 여래는 마침이 없는가, 여래는 마침이 있기도 하고 마침이 없기도 한가, 여래는 마침이 있지도 않고 마침이 없지도 않는가?’ 라는 견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일 세존께서 ‘이것은 진실이요, 다른 것은 다 허망한 말이다’라고 분명하게 아신다면 세존이시여, 저를 위하여 말씀하여 주소서. 그러나 만일 세존께서 ‘이것은 진실이요, 다른 것은 다 허망한 말이다’라고 분명하게 알지 못하신다면 ‘나는 모른다’고 정직하게 말씀하여 주소서.”

세존께서 물으셨다.
“만동자야, 내가 이전에 혹 너에게 ‘세상은 영원하다. 그러니 너는 나를 좇아 범행을 배우라’고 말한 적이 있었더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이와 같이 ‘세상은 영원하지 않은가? 세상은 끝이 있는가, 세상은 끝이 없는가? 목숨이 곧 몸인가, 목숨과 몸은 다른가? 여래는 마침이 있는가, 여래는 마침이 없는가, 여래는 마침이 있기도 하고 마침이 없기도 한가, 여래는 마침이 있지도 않고 마침이 없지도 않은가?’ 하는 견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이전에 혹 너에게 ‘이것은 진실이요 다른 것은 다 허망한 말이다. 그러니 너는 나를 좇아 범행을 배우라’고 말한 적이 있었더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만동자야, 너는 이전에 혹 내게 ‘만일 세존께서 저에게 '세상은 영원하다'고 분명하게 말씀하신다면 저는 세존을 좇아 범행을 배우겠습니다’라고 말한 적이 있었더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이와 같이 ‘세상은 영원하지 않은가? 세상은 끝이 있는가, 세상은 끝이 없는가? 목숨이 곧 몸인가, 목숨과 몸은 다른가? 여래는 마침이 있는가, 여래는 마침이 없는가, 여래는 마침이 있기도 하고 마침이 없기도 한가, 여래는 마침이 있지도 않고 여래는 마침이 없지도 않은가?’ 하는 견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만동자야, 너는 이전에 혹 내게 ‘만일 세존께서 저에게 '이것은 진실이요 다른 것은 다 허망한 말이다'라고 말씀하신다면 저는 세존을 좇아 범행을 배우겠습니다’ 하고 말한 적이 있었더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만동자야, 나도 이전에 너에게 말한 일이 없고 너도 또한 이전에 내게 말한 일이 없는데, 너 미련한 자야, 어찌하여 너는 부질없이 나를 모함하고 비방하느냐?”

이에 존자 만동자는 세존의 면전에서 직접 꾸지람을 듣고 마음으로 근심하고 슬퍼하며 머리를 떨구고 잠자코 말이 없었으나, 무엇인가 물을 것이 있는 것 같았다. 이에 세존께서 만동자를 면전에서 직접 꾸짖으신 뒤 모든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만일 어떤 어리석은 사람이 ‘만일 세존께서 나에게 '세상은 영원하다'고 분명하게 말씀해 주지 않으신다면 나는 세존을 좇아 범행을 배우지 않으리라’고 생각한다면 그 어리석은 사람은 마침내 그것을 알지 못한 채 그 중간에 목숨을 마치고 말 것이다. ‘세상은 영원하지 않은가? 세상은 끝이 있는가, 세상은 끝이 없는가? 목숨이 곧 몸인가, 목숨과 몸은 다른가? 여래는 마침이 있는가, 여래는 마침이 없는가, 여래는 마침이 있기도 하고 마침이 없기도 한가, 여래는 마침이 있지도 않고 마침이 없지도 않은가?’ 하는 견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만일 어떤 어리석은 사람이 ‘만일 세존께서 나에게 '이것은 진실이요, 다른 것은 다 허망한 말이다'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지 않으신다면 나는 세존을 좇아 범행을 배우지 않으리라’고 생각한다면, 그 어리석은 사람은 마침내 그것을 알지 못한 채 그 중간에 목숨을 마치고 말 것이다.
비유하면 마치 어떤 사람이 몸에 독화살을 맞은 것과 같다. 그가 독화살로 말미암아 매우 심한 고통을 받을 때에 그 친족들은 그를 가엾이 생각하고 불쌍히 여기며 그의 이익과 안온을 위해 곧 의사를 청하였다. 그러나 그 사람이 이런 생각을 한다고 하자.
‘아직 화살을 뽑아서는 안 된다. 나는 먼저 화살을 쏜 그 사람이 어떤 성ㆍ어떤 이름ㆍ어떤 신분이며, 키는 큰가 작은가, 살결은 거친가 고운가, 얼굴 빛은 검은가 흰가, 혹은 검지도 않고 희지도 않은가, 찰리족인가 혹은 바라문ㆍ거사ㆍ공사의 종족인가, 동방ㆍ서방ㆍ북방 어느 쪽에 사는가를 알아보아야 하겠다.
아직 이 화살을 뽑아서는 안 된다. 나는 먼저 그 활이 산뽕나무로 되었는가, 뽕나무로 되었는가, 물푸레나무로 되었는가, 혹은 뿔로 되었는가를 알아보아야 하겠다.
아직 이 화살을 뽑아서는 안 된다. 나는 먼저 그 궁찰(弓扎)이 소 힘줄로 되었는가, 노루나 사슴 힘줄로 되었는가, 혹은 실로 되었는가를 알아보아야 하겠다.
아직 이 화살을 뽑아서는 안 된다. 나는 먼저 그 활의 색깔이 검은가, 흰가, 붉은가, 혹은 누른가를 알아보아야 하겠다.
아직 이 화살을 뽑아서는 안 된다. 나는 먼저 그 활줄이 힘줄로 되었는가, 실로 되었는가, 모시로 되었는가, 혹은 삼으로 되었는가를 알아보아야 하겠다.
아직 이 화살을 뽑아서는 안 된다. 나는 먼저 그 화살이 나무로 되었는가, 혹은 대나무로 되었는가를 알아보아야 하겠다.
아직 이 화살을 뽑아서는 안 된다. 나는 먼저 그 살촉을 화살대에 고정시킬 때 소 힘줄을 썼는가, 노루나 사슴 힘줄을 썼는가, 혹은 실을 썼는가를 알아보아야 하겠다.
아직 이 화살을 뽑아서는 안 된다. 나는 먼저 그 화살 깃이 매 털로 되었는가, 보라매나 독수리 털로 되었는가, 고니나 닭털로 되었는가, 혹은 학의 털로 되었는가를 알아보아야 하겠다.
아직 이 화살을 뽑아서는 안 된다. 나는 먼저 그 살촉이 넓고 길쭉하며 얇은 비(錍)모양인가, 창 모양인가, 혹은 양쪽으로 날이 선 칼 모양인가를 알아보아야 하겠다.
아직 이 화살을 뽑아서는 안 된다. 나는 먼저 살촉을 만든 사람이 어떤 성ㆍ어떤 이름ㆍ어떤 신분이며, 키는 큰가 작은가, 살결은 거친가 고운가, 얼굴빛은 흰가 검은가, 혹은 검지도 않고 희지도 않은가, 혹은 동방ㆍ남방ㆍ서방ㆍ북방의 어느 쪽에 사는가를 알아보아야 한다.’
그러다 보면 그 사람은 결국 그것을 알기도 전에 그 중간에 목숨을 마치고 말 것이다.

이와 같이 만일 어떤 어리석은 사람이 ‘세존께서 나에게 '세상은 영원하다'고 분명하게 말씀해 주지 않으시면, 나는 세존을 좇아 범행을 배우지 않으리라’고 생각한다면, 그 어리석은 사람은 마침내 그것을 알기도 전에 그 중간에서 목숨을 마치고 말 것이다. 이와 같이 ‘세상은 영원하지 않은가? 세상은 끝이 있는가, 세상은 끝이 없는가? 목숨이 곧 몸인가, 목숨과 몸은 다른가? 여래는 마침이 있는가, 여래는 마침이 없는가, 여래는 마침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가, 여래는 마침이 있지도 않고 마침이 없지도 않은가?’라는 견해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만일 어떤 어리석은 사람이 ‘만일 세존께서 나에게 '이것은 진실이요, 다른 것은 다 허망한 말이다'라고 말씀하시지 않는다면, 나는 세존을 좇아 범행을 배우지 않으리라’고 한다면 그 어리석은 사람은 마침내 그것을 알기도 전에 그 중간에서 목숨을 마치고 말 것이다.
‘세상은 영원하다’는 이런 견해 때문에 나를 좇아 범행을 배운다면 그것은 옳지 못하다. ‘세상은 영원하지 않은가? 세상은 끝이 있는가, 세상은 끝이 없는가? 목숨이 곧 몸인가, 목숨과 몸은 다른가? 여래는 마침이 있는가, 여래는 마침이 없는가, 여래는 마침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가, 여래는 마침이 있지도 않고 마침이 없지도 않은가?’ 하는 견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견해 때문에 나를 좇아 범행을 배운다면 그것은 옳지 못하다.
‘세상은 영원하다’라는 이런 소견이 있기 때문에 나를 좇아 범행을 배우지 않는다면 이것도 옳지 못하다. ‘세상은 영원하지 않은가? 세상은 끝이 있는가, 세상은 끝이 없는가? 목숨이 곧 몸인가, 목숨과 몸은 다른가? 여래는 마침이 있는가, 여래는 마침이 없는가, 여래는 마침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가, 여래는 마침이 있지도 않고 마침이 없지도 않은가?’라는 견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견해가 있기 때문에 나를 좇아 범행을 배우지 않는다면 이것도 옳지 못하니라.
‘세상은 영원하다’라는 이런 견해가 없기 때문에 나를 좇아 범행을 배운다면 그것은 옳지 못하다. ‘세상은 영원하지 않은가? 세상은 끝이 있는가, 세상은 끝이 없는가? 목숨이 곧 몸인가, 목숨과 몸은 다른가? 여래는 마침이 있는가, 여래는 마침이 없는가, 여래는 마침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가, 여래는 마침이 있지도 않고 마침이 없지도 않는가?’라는 견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견해가 없기 때문에 나를 좇아 범행을 배운다면 그것은 옳지 못하다.

‘세상은 영원하다’는 이런 견해가 없기 때문에 나를 좇아 범행을 배우지 않는다면 이것도 옳지 못하다. ‘세상은 영원하지 않는가? 세상은 끝이 있는가, 세상은 끝이 없는가? 목숨이 곧 몸인가, 목숨과 몸은 다른가? 여래는 마침이 있는가, 여래는 마침이 없는가, 여래는 마침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가, 여래는 마침이 있지도 않고 마침이 없지도 않은가?’ 하는 견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견해가 없기 때문에 나를 좇아 범행을 배우지 않는다면 이것도 옳지 못하니라.
‘세상은 영원하다’는 견해를 가진 사람도 남[生]이 있고 늙음[老]이 있으며 병이 있고 죽음이 있으며 슬픔과 울음ㆍ근심ㆍ괴로움ㆍ번민이 있으니 이렇게 하여 순전히 괴로움뿐인 큰 무더기가 생긴다. 이와 같이 ‘세상은 영원하지 않다. 세상은 끝이 있다. 세상은 끝이 없다. 목숨은 곧 몸이다. 목숨은 몸과 다르다. 여래는 마침이 있다. 여래는 마침이 없다. 여래는 마침이 있기도 하고 마침이 없기도 하다. 여래는 마침이 있지도 않고 마침이 없지도 않다’는 견해를 가진 자도 남이 있고 늙음이 있으며 병이 있고 죽음이 있으며 슬픔과 울음ㆍ근심ㆍ괴로움ㆍ번민이 있으니 이렇게 하여 순전히 괴로움뿐인 큰 무더기가 생기느니라.

‘세상은 영원하다’고 나는 한결같이 그렇게 말하지는 않는다. 무슨 까닭으로 한결같이 그렇게 말하지 않는가? 그것은 이치와 맞지 않고 법과 맞지 않으며, 또 범행의 근본이 아니어서 지혜로 나아가지 못하고 깨달음으로 나아가지 못하며 열반으로 나아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한결같이 그렇게 말하지는 않는다. 이와 같이 ‘세상은 영원하지 않다. 세상은 끝이 있다. 세상은 끝이 없다. 목숨은 곧 몸이다. 목숨은 몸과 다르다. 여래는 마침이 있다. 여래는 마침이 없다. 여래는 마침이 있기도 하고 마침이 없기도 하다. 여래는 마침이 있지도 않고 마침이 없지도 않다’고 나는 한결같이 그렇게 말하지는 않는다. 무슨 까닭으로 한결같이 그렇게 말하지 않는가? 그것은 이치와 맞지 않고 법과 맞지 않으며, 또 범행의 근본이 아니어서 지혜로 나아가지 않고 깨달음으로 나아가지 않으며 열반으로 나아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한결같이 그렇게 말하지는 않느니라.
그러면 나는 어떤 법을 한결같이 말하는가? 나는 이런 이치를 한결같이 말하나니, 곧 괴로움[苦]과 괴로움의 발생[苦集]과 괴로움의 소멸[苦滅]과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의 자취이니, 나는 이것을 한결같이 말한다. 무슨 까닭으로 나는 이것을 한결같이 말하는가? 이것은 이치와 맞고 법과 맞으며 또 이것은 범행의 근본으로서 지혜로 나아가고 깨달음으로 나아가며 열반으로 나아간다. 그러므로 나는 한결같이 이것만을 말한다. 이것이 바로 말하지 않아야 할 것은 말하지 않고 말하여야 할 것은 말한다고 하는 것이다. 너희들은 마땅히 이렇게 가지고 이렇게 배워야 하느니라.”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자 모든 비구들은 부처님 말씀을 듣고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정교하지 않지만 작은 논의




내가 철학하는 사람들과 대화를 할 때마다 그들이 대화의 말미 정도에 갖게 되는 의문 중의 하나는 "분석철학을 전공했으면서 왜 분석철학을 좋아하지 않느냐?" 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의문은 전적으로 오해에 기반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대륙철학을 하는 사람들과 대화를 하면 그들이 갖는 의문은 "왜 당신이 가진 주제를 가지고 분석철학의 방법론을 사용하냐?" 는 것인데, 이것도 심각한 오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오해의 원인이 나에게 있는 것도 사실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그런 오해들에 대한 간략한 설명을 하고, 내가 하려는 철학이 분석철학적 방법론을 취하게 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말해보려고 한다. 그냥 떠오르는 생각들을 정리한 것이니 이 글에 엄밀한 논증을 기대하면 곤란하다.

보통 철학적 방법론은 철학자가 다루려고 하는 주제에 맞게 정의된다. 예를 들어서 논의의 주제가 좁다면 분석철학의 방법론을 사용하는 것이 권장되고, 큰 질문(Big Question)을 하고 싶다면 대륙철학의 방법론을 사용하는 것이 권장된다. 어디까지나 일반적인 이야기다. 하지만 이런 일반적인 이야기가 갖는 함정은, 좁은 영역에서 분석철학을 했을 때 정작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결과물이 한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좁은 영역에서는 작은 결과물밖에 나올 수가 없다. 우리는 애초부터 그런 것들을 기대하지 않았기 때문에 좁은 영역에서 큰 결과가 나오기를 기대하지 않는다. 반대로 큰 질문을 다루면 큰 결과물이 나오기를 기대하지만, 기대에 부응하는 경우는 사실 적다. 왜냐면... 철학이라는 분과 학문에서 큰 질문은 대답을 기대하고 던져지는 질문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방법론을 적용했을 때 발생하는 문제들에 대해서는 모두가 책임이 없다는 식으로 좀 멋대로인 태도를 취한다. 나는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하지만 반대의 접근을 한 사람이 없다는 점에는 종종 놀라움을 느낄 때가 있다.

나는 반대로 접근했을 때 철학에서 성과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비유를 드는 게 빠를 것 같은데, 만약 빛입자를 기술하고 연구할 때 고전역학을 들이밀고 거시적 세계에서 질량을 가진 물체의 운동을 기술할 때 양자역학을 들이민다면 이론물리학자는 그런 시도를 집어치우라고 말할 것이다. 여기서 난 고전역학을 분석철학이라고 생각하고 양자역학을 대륙철학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작고 좁은 영역에서는 우리의 상식을 배반하는 함수가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다. 함수를 이해할 수 없어도 우리는 함수를 사용한다.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나는 좁은 영역에서 철학적 논의를 하기 위해서 대륙철학의 방법론을 동원하고, 정말로 중요한 큰 질문을 다루기 위해서 분석철학의 방법론을 동원하려고 시도한다. 예컨대 메타윤리학에서 제기되는 중요한 문제는 분석철학의 방법론을 이용해야 해결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삶의 문제라거나 자살의 문제 같은 것들. 이것은 까뮈의 <시지프의 신화>가 얼마나 세밀한 논증으로 이루어져 있는가를 파악하면 전모를 알 수 있다. 까뮈는 주로 대륙철학으로 분류되지만, 까뮈 만큼 논리적으로 자살의 문제를 풀어낸 사람도 없다는 점은 적어도 그 세계 안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물론이지만 논의의 영역을 한정하고 다수의 컨센서스에 따라서 방법론을 적용하는 것도 중요하다. 논리학의 문제를 다루는 데 대륙철학을 사용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인간의 감성적인 부분이나 질적인 부분을 다루는 데 논리(학)을 들이밀 수도 없다. 질적인 부분을 논리적으로 환원했을 때 우리에게 남는 잔여들은 언제나 부족하다. 그러면 왜 우리는 큰 질문을 다룰 때 분석철학을 하려고 하지는 않을까? 큰 질문들이 다루는 인간의 어떤 부분들은 매우 합리적이지 않은가? 나는 철학하는 사람들과 장시간 대화를 하면서 사람들이 아무 생각 없이 소유한 고정관념을 깨 부수기 위해서 노력하지만 언제나 듣게 되는 이야기는 "분석철학을 하지는 않을 거에요" 라는 식의 말이었고, 그런 말은 나를 힘들게 만들었다. 그럴 때마다 스피노자의 말은 나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고귀한 것은 드물 뿐만 아니라 어렵다. 철학을 잘 한다는 말은 단순히 철학 공부를 잘 했다는 말과 동일하지 않고 후자는 전자의 어떠한 조건도 될 수 없다. 나는 그로텐디크의 말을 떠올린다.

"어느 수학자가 IHES를 방문했는데 도서관에 책이 매우 적었다. 그래서 그로텐디크에게 도서관에 책이 왜 이리 없냐고 물었다. 그 말을 들은 그로텐디크는 이렇게 대답했다. "우리는 책을 읽지 않습니다. 책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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