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를 맞아


40000힛 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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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일이 되었다. 올해는 저도 다른 사람들이 하는 것처럼 방명록을 만들겠습니다. 혹시 제게 전할 말이 있거나, 용건이 있거나, 아니면 일을 부탁할 경우는, 이 글 밑에 댓글을 달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라인(lerisia)으로도 연락 가능합니다.

올해 목표: 대학원 입학과 공부. 장편 소설을 하나 쓰고, 지면에 중편 이상의 소설을 발표하기. and also...




오버 더 펜스 감상



오버 더 펜스는 찌질한 남자들의 이야기다. 하지만 영화는 가장 덜 찌질해 보이는 시라이와(오다기리 죠 역)와 사토시(아오이 유우 역)의 연애를 다루면서, 이 영화를 "찌질한 남자"의 이야기로 만들지 않으려고 애쓴다. 이 시도가 성공했는가? 부분적으로는 성공했고, 부분적으로는 실패했다. 그렇다면 왜 그런지 하나씩 적어보기로 한다.

성공한 이유

시라이와는 자기연민을 극히 피한다. 외려, 자신의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는다. 훈련소에 같이 다니는 남자들도 다른 사람이나 인생 탓을 하지 않는다. 교관만 별 경험 없이 시끄럽지만, 나머지는 학교 밖에서 인생 경험을 겪으면서 인생이 쉽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모리는 대학을 중퇴하고, 하라는 중졸로 일했다. 그리고 헤어진 아내와 다시 만났을 때, 시라이와는 자신이 다른 사람을 망가뜨린다는 사실을 깨닫고 서글프게 운다. 이 깨달음은 하코다테에 오기 전까지는 없었던 것이다. 마지막에 홈런을 치는 장면에서 그가 과거의 트라우마를 극복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아오이 유우는 자신의 역할을 100%로 다 하고 있다.

실패한 이유

캬바쿠라의 여성들과 데이트를 하러 온 여성들의 모습이 그다지 주체적이지 않다. 남자들이 종종 보여주는 내적 연민과 찌질함을 그대로 받아준다. 아오이 유우의 연기는 거의 훌륭하지만, 가끔 그녀가 시라이와를 보는 건지 아니면 오다기리 죠를 보는 건지 헷갈린다. 무엇보다, 여성들끼리 나누는 대화가 거의 없다. 이 영화가 '남자의 이야기'라는 것을 너무나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의 관록 있는 연기는 이 영화를 단순한 "찌질남 하소연" 영화로 만들지 않는다. 그래서 국내외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던 것이리라.

나는 무엇보다 아오이 유우의 연기가 재밌었다. 사실 연기 스타일이 변했다는 흔적은 하나와 앨리스: 살인사건에서부터 나타나지만 말이다.

여자친구 - 청건


일반적인 만화의 미덕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것은 단순히 그림이 좋거나 예쁘다는 사실을 의미하지 않는다. 만화를 종합예술이라고 했을 때 그 말이 의미하는 바란 이렇다: 만화는 여러 가지 양식을 종합한 복합 예술이다. 즉, 대사가 있고 그림이 있으며 이야기가 있다. (장소와 시간을 알리기 위해) 배경이 있고, 캐리커쳐가 있으며 (흑백만화의 경우) 단색이라는 색상의 제한이 있다. 여기서 발생하는 그림자의 효과는 만화를 조금 더 진정성 있게 만든다. 만약 당신이 '진정성'이란 말을 싫어한다면, 그것을 무게감이라고 표현해 보자. 사태가 달라지지 않겠지만, 나는 이것이 만화를 정의하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만화 안에서는 어떤 것도 가능하다. 만화에서 극劇을 그리든, 아니면 영화를 찍거나 드라마를 찍든 그것은 만화의 형식 안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만화에서 연애 상대로 등장하는 대상은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 혹은, 과장된 표정으로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것이 '만화'임을 환기할 수도 있다. 예를 들면, 이번 글에서 다루고자 하는 여자친구는 이런 식으로 겉으로 보기에 어두운 인물을 묘사한다.


그러나 이렇게 물을 수 있다. 그림이 감정을 대표할 수 있는가? 내 생각에 이는 정확히 물어진 질문이 아닌 것 같다. 저 말을 다시 정리해 보면 이럴 것이다. "그림은 인물을 묘사하고, 인물은 감정을 가진다. 그런데 감정이 인물에게 표정이라는 표상으로 그대로 드러나는가?" 하지만 만화의 약속이 "우리가 보는 것이 알 수 있는 전부"라는 사실을 생각해 볼 때, 오히려 강조선을 넣거나 배경을 바꾸거나, 표정을 바꿨을 때 그제서야 인물의 감정이 탄생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니 여기서는 "이렇게?"라는 말이 하는 역할이, 표정과 연결되었을 때 그제서야 인물의 특징을 드러내는 역할로 전환되고 있다는 말이다. 이제 다음과 같은 예를 보자.


이 컷들에서 감정은 크게 두 가지로 표현된다. 하나는 "머라고~?" 라는 작은 말풍선과 함께 웃긴 얼굴 표정으로, 그리고 "승주랑 나랑 사귄다"는 말을 들었을 때 영이가 "미친.. 레즈?!" 라고 말하면서 놀라는 표정으로 표현된다. 전자와 후자의 차이를 우리는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데, 하나는 글씨체가 다르다는 것이고(손글씨와 볼드 궁서체), 다른 하나는 표정이 클로즈업되면서 완전히 달라진다는 점이다. 하지만 대사만 놓고 보면 그것은 큰 역할을 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스타일의 차이가 우리에게 '당황'과 '놀람'이라는 감정을 직접적으로 전달하고 있다. 이러한 요소는 만화의 기본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인물 내면의 동역학이 작품을 이끌어가는 힘이 되는 여자친구에서는 훨씬 많이 보인다.

하지만 만화가 그림이 다가 아니라고 말했을 때 그것은 그림이 '하나가' 아니라는 말도 될 수 있다. 여자친구에서 쓰이는 기법은 소년만화와 순정만화에서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분류되지 않는 만화에서는 인물의 감정이 표정이나 대사의 스타일을 통해 극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예를 들면, 토요다 테츠야가 그린 언더커런트의 다음 장면을 살펴보자.


주인공인 카나에가 대욕탕에 누워서 천장을 바라보고 있는 장면이다. 여기서 우리는 주인공의 감정을 표정이나 대사로 확인하지 않는다. 그보단 앞에서 제시되는 대화(남편이 도망갔다는 내용), 사람이 없는 고요한 목욕탕, 물결이 만드는 윤곽의 애매함으로 그녀의 감정을 대신 추리할 뿐이다. 왜 물에 빠졌는지, 뭘 생각하고 있는지 우리는 주어진 세 컷을 통해 쉽게, 직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결코 표정과 대사만큼 용이하다는 소리는 아니다. 이 만화에 침잠하는 감정을 파악하기 위해, 우리는 더 많은 정보를 받아들여야 한다. 쉽지 않은 일이긴 하다.

여자친구란 만화는 독자가 알기 쉽게 그려져 있다. 하지만, 어떤 만화들이 때때로 그런 것처럼 알기 쉬움이 반드시 "친절하다"는 사실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썸씽>에서 한나는 영이에게 썸남과 만나러 "가지 말라"고 말한다. 왜 그럴까? 한나는 영이를 좋아하는 걸까? 영이를 썸남에게 빼앗기고 싶지 않았던 걸까? 그런 질문들에 만화는 직접적으로 대답하지 않는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다만, 한나의 마음이 영이를 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것은 여자친구라는 만화가 가지는 힘의 진정한 원천일지도 모른다.


공교육이 바보 제조자(idiot maker)가 되는 이유?



한국의 공교육은 바보를 만든다고 말한다. 아마 그 바보들이 대부분 4년제 대학에 진학할 것이다. 그러나 "바보"라고 말하기만 한다면 그것은 별다른 의미가 없다. 어떤 의미에서 바보인지, 왜 바보를 만드는지 이유를 대야 하는 것은 "한국의 공교육은 바보를 만든다"고 주장하는 쪽에 있을 것이다. 내가 그러한 주장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한번 추측해 보겠다.

우선, 한국 공교육은 입시 위주의 교육을 수행한다. 입시는 내신이나 입학사정관 등의 예외를 제외하면 주로 수능인데, 수능은 정해진 교과과정 안에서 학습 성취도를 평가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수능의 문제들은 주로 암기식이며, 수능의 성패는 암기를 얼마나 잘 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그러나 나는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공부는 암기가 중요하다. 특히 공부를 시작할 때 암기가 중요하다. 수능의 가장 큰 문제는 그것이 응용(application)을 전혀 요구하지 않는 데 있다. 문제의 난이도와 교과과정이 달라질 뿐, 수능에서 학생 개인의 생각을 묻거나, 아니면 수시에서 주로 그런 것처럼 답이 주어지지 않거나 입장을 택하는 문제 해결력을 요구하지 않는다.

즉, 수능은 문제 해결력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측면에서 확실히 문제가 있어 보인다. 그러나 공교육을 비판할 때 입시 위주의 교육을 한다고 비판하면 공교육 측에도 할 말은 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확실히 우리는 수능을 대비한 공부를 학생에게 하게 만든다. 그렇게 가르친다. 그러나 우리는 학생들을 좋은 대학에 보내야 할 의무가 있다." 그러나 왜 "학생들을 좋은 대학에 보내야 할 의무"가 있는지 설명해야 하는 것은 비판자가 아니라 교사들이다. 아마 그들은 이렇게 주장할 것이다.

1. 한국은 대학 서열이 이후의 삶에 크나큰 영향을 준다. 교사는 학생의 삶을 책임져야 한다. 따라서 입시위주 교육을 시킬 수밖에 없다.
2. 좋은 대학에 가면 더 많은 교육 기회를 제공한다. 그 실익이 수능을 공부하는 불이익보다 크다. 따라서 입시위주 교육은 필요악이다.

우선 1부터 살펴보자.

1은 "책임"이라는 말의 사용에 의미가 있다. 우리가 "교사는 학생의 삶을 책임져야 한다"고 말할 때 교사를 학원 강사와 1:1로 대응시켜서 생각하지 않는다. 확실히 학원 강사는 학생을 좋은 대학에 보낼 의무가 있다. 그걸 하라고 학생의 부모로부터 직접 현금을 받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사는 국민의 세금에서 봉급을 받는다. 국민의 세금은 공동체를 위해 쓰여야 한다(개개인이 동의하지 않더라도 다수의 합의가 존재한다). 그러나 대학 서열을 유지하는 일이 공동체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기 매우 어렵다. 대학 서열은 고질적인 문제를 안고 있으며 정상적이라면 쓰지 않았을 사교육에 막대한 돈을 지불하게 만든다. 만약 공교육을 정상화한다면, 가장 먼저 사라져야 할 것은 지금과 같은 일원적인 대학 서열이다. 따라서 1의 주장은 "책임"의 의미를 잘못 파악한 것이다.

2는 과연 실익이 불이익보다 큰가? 그리고 좋은 대학이 더 많은 교육 기회를 제공하는가? 라는 질문을 할 수 있다. 실익이 불이익보다 크려면 학생이 좋은 대학의 교육을 잘 이용해야 한다. 하지만 다음과 같은 주장을 살펴보자.

a. 바보는 문제 해결력이 떨어지는 사람으로 정의한다.
b. 문제 해결력이 떨어지는 사람은 교육을 이용할 수 없다.

나는 a-b가 필연적으로 성립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즉, 문제 해결력이 떨어지는 사람이라도 교육을 잘 이용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런 경우라면 사정이 다르다.

b1. 만들어진 바보는 높은 신뢰성을 가진 자신의 프레임으로 세상을 보며, 따라서 프레임에 대한 교정 가능성이 현저히 결여되어 있다.

a-b(b1)는 만들어진 바보가 교육을 잘 이용할 수 없는 가능성이 높다는 주장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수능이 바보를 만든다면 그 바보는 태생적 바보가 아니라 만들어진 바보일 확률이 아주 높다. 따라서 좋은 대학의 교육을 잘 이용하기도 어렵다. 그러므로 실익이 불이익보다 크다고 말하기 굉장히 어려운 이유가 있다. 덧붙여, 좋은 대학이 더 많은 교육 기회를 제공하는가? 라는 주장은 바보가 교육을 잘 이용해야 함을 전제로 하고 있다. 하지만 앞의 이유로 그러한 일이 잘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결론적으로, 1과 2의 주장에는 상식을 가진 사람도 받아들일 법한 더 설득력 있는 근거가 필요하다. 만일 그 근거가 설득력 있다면, 공교육이 바보를 만든다는 말도 큰 의미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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