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를 맞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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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일이 되었다. 올해는 저도 다른 사람들이 하는 것처럼 방명록을 만들겠습니다. 혹시 제게 전할 말이 있거나, 용건이 있거나, 아니면 일을 부탁할 경우는, 이 글 밑에 댓글을 달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라인(lerisia)으로도 연락 가능합니다.

올해 목표: 학회 참석하기, 지면에 중편 이상의 소설을 발표하기. 야마노우에 호텔에서 숙박하기. and also...

오늘의 음악: Homecomings 「Songbirds」, 뮤지컬 위키드 중에서 「마법사와 나」 feat. 후지 아오이(富士葵)





무라카미 다카시의 새로운 도전

미술세계 2017년 3월호에 기고한 글. 오랜 시일이 흘렀기에 블로그에 각주를 제외한 전문을 싣는다.
(혹시 졸저를 인용할 생각이라면 아래 글이 아니라 dbpia의 링크를 참조하기를 부탁드린다. 링크)



현대 미술가이자 팝 아티스트로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무라카미 다카시(村上隆, b. 1962)가 TV용 애니메이션을 제작한다고 발표했을 때, 사람들의 반응은 대체로 극과 극으로 나뉘었다. 한쪽—주로 미술을 전공한 사람들이나 미술가, 해당 업계인들—에서는 무라카미 다카시의 새로운 시도에 기대했고, 다른 한쪽—애니메이션 업계 관계자나, 소위 오타쿠라 불리는 애니메이션 애호가들—은 무라카미 다카시의 시도에 어렴풋한 기대가 섞인 불안을 품고 있었다. 작품 방영 이전까지 수많은 이야기들이 트위터 타임라인과 마토메 블로그를 점령했고, 무라카미 다카시가 “완성하지 못한 부분은 선화(스케치) 단계에서 그대로 나갈 것이다”라고 말한 뒤에는 걱정이 기대를 뛰어넘었다. 그리고 12월 30일 저녁, <Six Heart Princess(이하 6HP)>가 일본 전국에서 방영되었다.

문제작 6HP에 대해 말하기 전에 무라카미 다카시의 작업을 간략히 정리해 보자. 무라카미 다카시는 도쿄예술대를 박사과정까지 마친 고학력자로, 학사 출신이 많은 일본 미술계에서 학력으로 돋보이는 드문 존재였다. 초기에, 카이카이 키키를 설립하기 전까지 일본화를 재해석한 작업을 해 오던 그는, 2001년에 ‘카이카이 키키’를 설립하며 작업에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기존의 일본적인 소재를 넘어 일반인들이 자주 접하는 주류 문화가 아닌, 일본의 만화, 애니메이션 등 서브컬쳐라는, 일반인들이 자주 접하지 않는 장르를 자신의 해석을 가미해 작업의 기틀로 삼은 것이다. 눈이 크게 데포르메(deformation)된 일본 만화식 미소녀를 거대한 피규어로 제작하고, 캐릭터의 성적인 특징을 부각시켜 서브컬처에서 때로는 암시되고, 때로는 중심에 있었던 ‘성’을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내었다. 더불어, 초평면(superflat)이라고 일컫는 극단적으로 납작한 공간을 화폭 안에서 표현하고, 이를 현대 일본사회를 이해하는 하나의 단초로 해석하기도 했다. 이처럼 무라카미 다카시는 서브컬쳐의 맥락과 문법을 재해석해 도입하면서 기존의 미술계를 열광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반응은 그가 사용한 서브컬쳐라는 장르는 일본에서 독자적으로 발전한 오타쿠 문화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것과도 관련이 있다. 오타쿠 문화는 서구 사회에서는 발견하기 어려운 것이었고, 전혀 새로운 것으로 여겨졌다. 무라카미 다카시의 작업을 통해 미술계는 비디오 게임이나 만화보다는 한 발 늦게 서브컬쳐를 자신의 영역 안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따라서 무라카미 다카시가 서브컬쳐의 본류라고 말할 수 있는 TV 애니메이션에 도전한다고 선언했을 때, 두 편의 반응이 정반대로 나뉜 것도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할 수 있다. TV 애니메이션은 고유의 문법을 가지고 있으며 해당 업계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의 수도 많다. 또한, 일본의 심야 애니메이션은 2000년대 중반 이후 높은 퀄리티를 유지하며 1쿨(13화/3개월)이나 2쿨(26화/반년) 동안 꾸준히 작품을 방영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런 와중에 업계인이 아닌 사람이, 그것도 1화 분량만 저녁 시간대를 빌려 발표한다고 했으니 애니메이션 측의 부정적인 반응도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들리는 소문에 따르면 무라카미 다카시는 한 화 분량의 애니메이션을 제작하는 데 대략 7년 정도 걸렸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1쿨 애니메이션을 완성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대략 1년에서 1년 반 정도임을 감안한다면, 7년이라는 시간은 어마어마하게 긴 시간이다. 이를 모두가 알고 있었고, 그래서 TV 앞에서 무라카미의 작품을 직접 두 눈으로 보려는 사람들은 생각보다 많았다.

이윽고 22분 분량의 본편 6HP와 함께 메이킹 필름이 공개되었다. 메이킹 필름은 주로 무라카미 다카시의 작업 방식을 다루었다. 그는 한번 완성한 그림콘티를 다시, 또 다시 반복해서 그렸는데, 이것이 애니메이션 제작에 7년이나 걸린 첫 번째 이유였다. 일본의 미술 잡지 미술수첩(美術手帖)에서 본인이 한 말을 인용하자면 다음과 같다. “22분짜리 CG 애니메이션을 제작한 적이 있지만, 뭔가 달라! 마음에 안 들어! 라면서 완성되었음에도 발표하지 않고 다시 만들었죠. 그 뒤로도, 여러 가지 우여곡절이 있어서 지금에 이르렀습니다.” 두 번째 이유는 그가 온전히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데 시간을 활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회화작업을 하며 틈틈이 도쿄와 홋카이도에 있는 카이카이 키키 스튜디오에 들러 애니메이션 작업을 해 나갔고, 이는 일반적인 애니메이션 제작과는 거리가 있었다. 즉, 무라카미 다카시는 애니메이션 또한 자신의 작업의 일환으로 이해하며 6HP를 제작했다. 그래서일까, 6HP가 방영된 뒤에 수많은 악평이 트위터 타임라인을 점령했고, 이를 무라카미 다카시가 리트윗하는 웃지 못할 일이 벌어졌다(첨언하자면, 이는 무라카미 다카시의 네거티브 상법으로 잘 알려져 있는 것이다).

6HP에서 주목할 점은 크게 세 가지다. 첫째는, 무라카미 다카시가 기존의 마법소녀물의 형식을 그대로 가져오면서 자신의 독특한 색채를 가미했다는 것이다. 〈세일러문〉 등 수많은 애니메이션에서 볼 수 있는 한 소녀와 이상한 동물의 만남 - 특유의 복장을 입은 모습으로 변신 - 악당이나 괴수를 처치 - 마을에 평화를 가져옴이라는 스토리를 그대로 차용하면서 “인仁”이나 “의義” 같은 동양의 개념을 그 속에 융합시킨다. 30분도 채 되지 않는 1화 분량의 애니메이션 안에서 많은 정보를 설명할 수 없으므로 주인공이 되는 “인” 캐릭터만 등장하지만, 간접적으로 캐릭터가 동양의 인 개념을 빌려 오면서 그와 같은 세계관 속에서 이야기가 전개될 것임을 암시한다. 이는 애니메이션의 처음 5분에 흐르는 난해한 세계관의 설명과, “십우도”라는 유명한 선불교의 그림을 학교의 선생님이 설명하면서 등장하게 된다.

둘째는, 주인공인 하루카가 변신할 때 변신 장면이 매우 에로틱하게 그려진다는 것이다. 과연 이런 설정이 필요할까 싶을 정도인데, 변신 와중에 주인공은 신음 비슷한 소리를 낸다. 보통 마법소녀물에서 주인공이 변신할 때 전라 상태에서 복장을 착용하는 모습은 쉽게 볼 수 있지만, 6HP의 경우 이것보다는 조금 더 노골적이고 직접적인 방법으로 여성의 신체를 에로틱하게 표현한다. 이는 무라카미 다카시가 작업을 해 온 맥락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서브컬쳐가 보수적으로 거론되는 ‘성性’을 해석하는 새로운 방법을 동인 문화 안에서 찾아냈던 것처럼, 오타쿠 1세대에 속하는 무라카미 다카시는 성애 표현에 대한 거부감이 적었다. 어릴 적부터 애니메이션과 만화를 보며 자라온 그에게 있어, 여성이 성애적인 대상으로 표현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이었다. 미국과 일본이 차이나는 점도 이 지점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의 동인 문화는 주로 특정한 장르, 즉 SF나 판타지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반면에 일본은 특정한 장르를 중심으로 뭉친 것이 아니라, 여러 장르 안에서 남성과 여성의 이항대립을 해소하는 서사를 중심으로 동인 문화가 형성된다(일본 최대의 동인행사인 코믹 마켓에서 팔리는 대부분의 물건이 성인 동인지라는 점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다). 무라카미 다카시의 작업에서 남성과 여성의 오브제가 동시에 극적으로 성적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것도, 이를 통해 이항대립이 해소될 수 있다는 생각을 반영한 결과이지만, 동시에 그 밖으로 벗어날 수 없는 서브컬쳐의 한계를 지적하는 것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이 작품은 대표적인 마법소녀물 <프리큐어> 시리즈와 여러 설정과 장면에서 일치한다. 주인공의 복장도 프리큐어의 주인공 캐릭터 3인과 거의 일치하고(빨강, 파랑, 노랑의 3원색을 키 색상으로 설정한 것도 같다), 엔딩에서는 지난해에 작고한 마에다 켄(前田健)이 안무를 맡아서 3D 캐릭터가 춤을 춘다는 점에서도 일치한다. 이렇게 프리큐어 시리즈를 거의 베끼는 식으로 작업한 이유는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우선 시청자가 알기 쉬운 프리큐어를 통해 관심을 끌 수 있고, “어디서 베낀 듯한” 캐릭터를 시청자에게 보여주면서 6HP에 대해 트위터나 블로그에서 말하기를 기대할 수 있다. 그리고 더 중요하게는, 화제가 된 마법소녀물에 대한 무라카미 다카시의 패러디다. 비록 PV밖에 발표되지 않았지만, 유투브에 공개된 6HP의 예고편에서는 비행기를 타고 오키나와로 놀러가는 주인공 일행이 갑작스럽게 사고를 맞아 초현실적이고 기괴한 광경에 말려드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악의 존재”로 드러나는 이상한 괴물과 끔찍한 방식으로 사망하는 소녀는 <마법소녀 마도카 마기카>를 떠올리게 만든다. 여기서 나오는 마법소녀들은 무의미한 싸움을 거듭하면서 마녀로 흑화하는데, 추측컨대 무라카미는 <마법소녀 마도카 마기카>의 패러디도 염두에 두었던 것 같다.

정리하자면, 6HP는 평범한 마법소녀 애니메이션으로 이해하면 기본적인 완성도도 보장하지 못하는 재미없는 작품일 수 있지만, 무라카미 다카시가 이제까지 해 온 작업의 연장선상에서 보면 재밌는 작품이라는 사실이다. 7년이라는 시간도 그가 애니메이션 감독이 아니라 현대 미술가임을 이해한다면 고개를 끄덕일 수 있다. 아쉽게도 한 화 분량의 짧은 작품이라 한국에 번역되어 공개될 일은 없겠지만, 그가 애니메이션이라는 새로운 시도를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앞으로 발표하게 될 그의 작품과 전시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6HP〉이 그의 개인전에서 상영될 수도 있을까? 모를 일이다.

9. 10. (부제: 유교)

"지난 학기 혼밥으로 3㎏이 빠졌다는 대학생 정수현26ㆍ가명) 씨는 “이번 학기에도 ‘혼밥은 강제 다이어트’일 것”이라고 말했다. 12학번인 정 씨는 “아는 후배들은 많지만 4학년은 좀 더 치열하게 다니고 싶어 혼밥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주머니 사정 때문에 매일 편의점 음식으로만 끼니를 때우다보니 학기말엔 물려서 못먹겠더라”며 끼니를 자주 거른다고 밝혔다.

취업준비 등으로 바쁜 대학생들 다수는 정 씨처럼 끼니를 편의점, 카페 등에서 판매하는 제한된 메뉴로 때우거나 굶는 일이 잦다.

알바몬이 최근 대학생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결과에 따르면, 대학생 78.4%가 혼밥을 해봤다고 응답했지만, 혼밥ㆍ혼영(혼자 영화)ㆍ혼놀(혼자 놀기) 등의 행위에 ‘만족한다’고 답한 비율은 이보다 낮은 65.6%에 그쳤다. 응답자의 34.4%는 여전히 ‘함께 할 누군가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답해 3명 중 1명은 아쉬움을 느끼는 것으로 나타났다." (사유를 촉발한 신문 기사)


한국에서 아름다운 글, '미문'이라고 불리는 글은 주로 보수 성향의 문필가가 쓰는 경향이 있다. 한 가지는 글쓰기가 사람들의 생각과 달리 매우 보수적인 전통을 가진 활동이라는 것이고, 다른 한 가지는, 주로 보수 성향의 매체에서 기자로 일하면서 글쓰기를 배운 사람이 문필가가 되었기 때문이다. 후자에 대해서는 진보 성향의 작가들도 할 말이 많을 수 있다. 우리의 글은 왜 아름답지 않느냐, 그런 기준은 편향적이지 않냐 등. 하지만 아름다운 글이라는 것이 대중의 독서와 인정 위에서 성립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면, 한국인의 보수성을 그대로 반영하는 글이 미문의 평가를 받는 건 자연스럽다.

넓은 의미에서 유교권 문화에 속한 한국인이 보수적이라는 사실은 우리가 피할 수 없는 조건으로서 문화 속에 자리잡고 있다. 아무리 진보적인 작가가 자신만의 문체로 좋은 글을 쓴다고 할지라도, 보수 성향의 작가가 기자 시절에 갈고 닦은 '수려한', 미문으로 인정받는 문체를 이기기란 쉽지 않다. 글쓰기의 문제, 다시말해 예술의 문제가 유독 정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또 작가들도 그런 적용을 마다하지 않는 한국이지만, 어떤 문장이 아름다운지에 대한 철저한 고민이 없이 몇몇 작가가 구사하는 문체를 '미문'이라고 말하는 것은, 지금 여기에서 인문성의 부족을 보여주는 것만 같아서 씁쓸하다. 김영건만큼 위대한, 그러나 저평가를 받아 온 철학자도 없다는 생각이다.

한국이 어떤 나라에 비해, 이웃나라에 비해 '비인간적'이라고 말했을 때는, 일반적으로는 비인간적이라는 말이 자본주의나 경쟁의 속성인 것처럼 받아들여지지만, 마찬가지로 자본주의적이고 경쟁적인 미국 같은 나라들이 한국보다 인간적이라는 사실로부터 두 가지의 속성이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진다. 한 가지 사례를 예로 들어보자. 누군가 특정한 지위를 얻지 못하거나 재화에 접근하는 일에 실패했을 때 이유가 '그가 특정한 연(사회 속에서 특수화된 관계)이 없었다'라는 것이라면, 그러한 연을 정당화하는 사회의 근본적인 논리가 무엇인지를 먼저 파악하고 문화 속에서 어떻게 정당화되는지를 먼저 분석해야 한다.

이게 "유교"라면 유교가 무엇을 정당화하는지를 먼저 검토해야 한다. 여기서는 유교의 본질이 뭔지, 유교가 어떤 가르침을 주는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전근대적 공동체가 스스로의 존립과 지배 구조의 확립을 위하여 특유의 '인맥' 문화를 발전시켜 왔다는 사실은, 문화 속에서 하나의 힌트가 된다. 즉 유교가 공동체의 논리에 선행하는 근본 사상이 아니라 유교를 이용해서, 오직 스스로의 존립과 지배 구조(양반-노예)의 확립을 위해 유교를 도구적으로 이용했을 뿐이라면, 사실 문제는 개별 사례의 비인간성이 아니라 유교 문화를 자연스럽게 공기처럼 호흡하고 있는 사람들의 무자각성일 것이다.

그리고 탈유교한 국가들, 예컨대 일본에서 개별 사례에 어떤 논리가 작용하고 있는지를 잘 분석한다면 한국에서의 '비인간성'이 자본주의에서 비롯하는 모순이 아니라, 한국의 특수한 문화 속에서 발생하고 전승되어 온 부조리한 논리에서 비롯하는, 문화 속에서는 해결할 수 없는 모순임이 밝혀진다. 한국에서 발생하는 모든 문제들은 유교 문화와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 있으며, 이것은 경제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으로는 해소될 수 없는 문제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우리는, 전적으로 유교인이 아닌 이상, 한국의 유교 문화와 끊임없이 불화하면서 해결책-물론 궁극적인 해결책은 이 나라를 떠나는 것이다-을 찾을 수밖에 없다.

문화와 망명



내 블로그를 즐겨 읽는 독자라면 "문화와 망명"이라는 제목에도 크게 놀라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내 블로그를 즐겨 읽지 않거나, 우연한 계기로 하나와 앨리스를 위한 방에 도달해서, 다시 돌아가기보다는 한번 블로그 글을 읽어보겠다는 생각을 하고 맨 위에 올라가 있는 방명록을 지나, 이 글에 도착한 익명의 독자라면 "문화와 망명"이라는 제목이 대체 무슨 뜻인지 궁금해서 견딜 수 없을 것이다. 사실, 문화라는 말은 우리가 너무 자주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왜곡되어 있으며, 마찬가지로 망명이라는 말도 '난민'이라는 말과 비교하면 부정적인 의미로만 사용되어 왔기에 언어에 대한 감각을 다시 찾기 위해서라도, 한 가지 예를 통해 제목의 두 단어를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를 찾아보는 게 좋아 보인다.

일본에서만 발견할 수 있는 몇 가지 독특한, 혹은 신기한 개념이 있다. 이 중에서 "코토다마言霊"라는 말이 있고, 공기空気라는 말이 있으며, 심령 스팟心霊スポット이라는 얼핏 들어서는 무슨 뜻인지 짐작할 수 없는 말이 있다. 코토다마는 말에 담긴 혼령적인, 주술적인 힘을 의미한다. 일본인은 말이 단순하게 분절되고 분석되는 자연언어가 아니라, 그 말 속에 모종의 힘이 있어서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한다고 진지하게 믿었다. 현대 일본인은 공기 속에서 살아가면서 주위의 공기와 역행하는 경우에, 사회에서 배척받지는 않을까 두려워한다. 마찬가지로, 심령 스팟에 가는 일본인은 그곳에서 진짜 유령을 보았다고 말하지만, 아쉽게도 사진에 찍혀 있는 유령들은 전부 가짜로 밝혀졌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에도 시대(메이지 유신 이전의 약 250년 가까이 되는 일본의 역사)에는 오키테掟라는 말이 있었다. 이 말의 뜻은 사회에 속한 사람들이 반드시 지켜야 하는 규범 또는 법을 의미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법은 현재의 사법 체계처럼 법전 속에 명문화되어 있지는 않았다. 반대로, 사회 속에서 자생하는 법이 막부 쇼군의 명령에 우선하고, 마을의 암묵적인 규범을 지키지 않은 사람은 그 마을에서 추방되어 부락민部落民이 되거나, 혹은 아무도 맡으려고 하지 않는 비천한 직업에 종사하였다. 에도 시대의 오키테라는 말이 현대에서는 공기라는 말로 대체되면서 그 무게를 잃어버린 것 같지만, 유령에 대한 공포는 오히려 과거에 추방되었던, 오키테를 위반하고 마을에서 추방된 인간(원령)에 대한 근원적인 두려움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심령 스팟에서 사진을 찍는 일본인은 현재와 과거가 교체하는 경험을 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대체 왜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문화와 망명"이라는 제목을 달았냐고 물어보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당연하지!) 사실 문화라는 것도 사람과 자본, 규범과 공동체 없이는 성립하지 않는다. 프로이트의 통찰이 옳다면 공동체는 언제나 원한 감정을 품고 있는데, 공동체에서 추방된 자들을 위한 위령이나 애도는 바로 공동체 자신의 공격 충동에 대한 일종의 반성이다. 공동체는 언제나 누군가를 희생양으로 삼고 그를 없애고, 지워버리려는 강력한 충동으로 자신을 유지한다. 우리 사회의 규범이 강력한 만큼, 공동체는 추방에 대한 보다 더 근본적인 입장을 인간에게 강요한다. 결과적으로, 규범 밑의 인간은 그러한 사회가 품고 있는 강력한 충동과 함께 약한 기반--개인의 힘이 존재하지 않는 사회의 폐쇄적인 메커니즘과 동역학--을 발견하게 된다.

여기서 마치 캐리비안의 해적에서 잭 스패로우가 배를 뒤집었던 것처럼 쫓겨난 자와 쫓아낸 자의 지위가 역전된다. 쫓겨난 자(개인)는 쫓아낸 자(공동체)에 대한 메타-시점을 얻는다. 그는 이제 더이상 공동체가 자신을 만족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며, 따라서 공동체가 그에게 주었던 쾌락을 다른 방식으로, 예컨대 새로운 공동체를 찾아 나서거나 자신이 문화를 발명함으로써 쾌락의 새로운 회로를 창조한다. 하지만 이러한 대역전(大逆転), 투르 드 프랑스의 파이널 레이스는, 1등이라는 독점적 지위를 추방자와 망명자 모두에게 허용하지 않음으로써, 그의 진정한 목표를 드러낸다. 문제가 언제나 문화였다면, 문화의 문제를 해소할 수 있는 방법론은 문화를 내버려 두는 임시방편적인 도망이 아니다. 아무리 도망을 친다고 해도 문화의 근원적인 법; 정초하는 법과 제약하는 규범이 공동체를 지배하고 있는 이상 문제는 진정으로 해결될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문화의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가? 이 과제는 쇼펜하우어부터 시작해서 니체, 슈펭글러, 비트겐슈타인, 하이데거, 그리고 현대 사상가들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들이 골몰하고 애써 왔던 주제이다. 만약 역사가 헤겔의 말대로 한 번은 끝난다면 인류의 역사는 문화 이후를 기록할 수 있는 새로운 방법론을 발명해야 할 것이다. 이게 무엇인지 예측할 수 없더라도, 내가 나의 능력으로 짐작할 수 있는 한 가지 사건은, 바로 거대한 뒤집힘(upside-down)이다. 잭 스패로우가 배를 뒤집으려고 결심하였던 이유는 그가 신비한 지도를 유심히 관찰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 유비를 적용하자면, 아마 세상을 뒤집는 사람이란 과거의 지도 속에서 힌트를 얻는 문헌학자이자 모험가이리라. 그게 누가 될 것인지는 도저히 알 수 없는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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