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를 맞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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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일이 되었다. 올해는 저도 다른 사람들이 하는 것처럼 방명록을 만들겠습니다. 혹시 제게 전할 말이 있거나, 용건이 있거나, 아니면 일본어 번역 업무를 부탁할 경우에는, 이 글 밑에 댓글을 달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라인(lerisia)으로도 연락 가능합니다.



오늘의 음악: 험버트 험버트 「작은 목소리」 (공식 뮤직 비디오), 요네즈 켄시 「바다의 유령」




중세와 현대


"나는 가상의 질서만 좇으며 죽자고 그것만 고집했다. 우주에 질서가 없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나... 이것이 어리석은 것이다... (중략) 우리가 상상하는 질서란 그물, 아니면 사다리와 같은 것이다. 목적을 지닌 질서이지. 그러나 고기를 잡으면 그물을 버리고, 높은데 이르면 사다리를 버려야 한다. 쓸모 있기는 했지만 그 자체에는 의미가 없음을 깨닫게 되니까 말이다.. .. (중략)... 유용한 진리라고 하는것은 언젠가는 버려야 할 연장과 같은 것이다.."


중세와 현대는 그 모습에서 얼마나 서로 닮아 있는가. 중세는 중세이고 현대는 현대이지만, 시대의 이름이 다르다는 것만 제외하면 중세는 현대와 똑같다. "우주에 질서가 없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사람들이 우주의 질서는 이렇다고 말하면서, "목적을 지닌 질서"가 우리 세계에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지식에는 한계가 없고, 앎에는 "의미가 없"다. 현대의 전문가주의(proism)는 한 줌의 앎을 위해서 모든 종류의 회의를 포기했다. 그렇게 모든 것들이 존재한다고 사람들은 믿고 있지만, 그 믿음에는 근거가 없는 것이다. 마치 칸트가 자신의 모든 믿음을 정당화하기 위해 물자체라는 이론적 대상물을 가정한 것처럼. 칸트의 믿음이 근거 없다면, 모든 것들도 최종적인 근거를 갖지 않는다.

7.4.



대다수의 한국인들은 남을 존중하는 것과 공적 활동이 남에게 개입하지 않는 것을 동일하다고 생각한다. 사실 그렇지는 않다. 와그 7화 보면서 느끼는 점: 야마칸은 인간 마음의 바닥을 여과 없이 보여준다. 자비없는 연출을 하면서 약간 신들린 듯한 느낌도 준다. 칸나기 마지막 화가 그랬지. 러키스타도 약간 그런 느낌을, 겉으로는 보여 주지 않으면서 암시하는 것 같았다.
남에게 필요 이상으로 가혹하면 안 된다. 의미가 없는 행동이거나, 태도이기 때문. (그리고 남에게 필요 이상으로 가혹하면 안 된다는 교훈을 보여 주는 훌륭한 작품이 위플래시. 재즈 드럼을 아무리 잘 친다고 해서 주인공이 잃어버린 것들이 다시 돌아오지도 않고, 나보다 더 잘 치는 사람도 많기에) 물론 의미가 없는 일일지라도 계속 하다 보면 의미가 생길 거라고 믿고 할 수밖에 없는 게 인간이지만, 그건 자신에게 거는 기준일 때 가혹함의 형벌을 피할 수 있다. 남이 다른 사람에게 가혹할 이유도 없고, 결국 의미가 없는 행동에 불과하면 서로의 감정만 상하는 결과가 도출될 가능성이 높다.

스스로 할 줄 아는 아이는 스스로 할 줄 모르는 아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스스로 할 줄 모르는 아이는 스스로 할 줄 아는 아이를 이해한다. 스스로 일을 처리할 수 있다는 건 축복받은 재능이라고 할 수 있으니까, 축복받지 못한 사람이 반대편을 이해할 수 있다는 건 어떻게 보면 필연적인 일이에요. 나이들고 보니 중요한가? 싶은 생각도 든다. 스푼으로 떠 먹여 주는 사람이 필요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으면, 그 사람에게 스푼을 떠 먹여 주는 일은 필요하다. 어릴 때는 자립이라고 하면 엄청 멋지게 보이고 그랬지만 이제는 자립할 수 있는 사람은 특권을 가진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어서다. 스스로 공부한다, 자율적인 정신, 자립해서 살자라고 말하면 수사적 멋짐은 있다. 남에게 도움을 받지 않고 살아가는 삶에 간지가 있는 것 같잖아? 하지만, 이제는 자립할 수 없는 사람에게 자립을 말하는 일은 특권을 가진 사람이 특권을 망각하고 스스로 모든 걸 성취하기를 강요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제 난 사람들에게 자립을 기대하지 않는다. 같이 잘 해 낼 수 있기만을 바란다. 진심으로.


혁신과 규제



블루마스님이 아래와 같은 트윗을 해서, 몇 가지 생각이 들어서 글을 적어 본다. 이하 인용.

"‘소셜 다이닝 스타트업’에서 ‘구체적으로 협업을 제안드릴 방안은 없지만 만나서 이야기하자’라는 메일을 보냈다. 기억으로 이게 처음이 아닌 것 같은데. 늘 똑같음. ‘우리는 쉽게 돈을 벌고 싶은 사람들인데 방법은 모르겠어. 그런데 어디에서 너라는 인간의 글을 우연히 주워 읽었는데 한 번 만나서 이야기 좀 하자. 물론 뭘 이야기할지는 모르겠고 보수 같은 건 없지’ 그냥 내 책 사서 읽으면 사람 만날 필요도 없고 돈도 별로 안 먹히는데 그렇게는 못함. 귀찮고 힘드니까. 학원 강사에게 답 찍어 달라는 멘탈리티임. 그리고 그런 메일 보내는 인간들 100퍼센트 남성. 인간이 싫어진다. 기둥 뒤에 공간 있고 나도 돈 벌어서 먹고 사는 생활인임."



그러고 보니 창업을 할때 규제를 줄여 달라는 말이 많은데 그 시간에 좋은 창업 아이템을 개발하는 게 낫지 않을까. 규제라는 건 결국 기존의 사업이나 시스템의 권리를 인정해 주겠다는 거고 이 말은 합리적으로 생각해서 두 사업이 겹치면 전자에 우선권을 준다는 것이다. 규제 자체가 나쁘지 않다. 창업 아이템이 없으면 창업을 안 하는 게 정상적인 사고 방식이지만, 창업을 하겠다는 사람들은 고민이나 토론 없이 창업을 하고 싶은 마음만으로 창업을 한다. 그러다 보면 기존의 권리를 침해하게 되는 일은 필연적. (생각을 하지 않고 일을 벌이기 때문에 남들이 생각하는 관성을 따라가게 되므로) 남들이 벌어 먹고 사는 일을 이름만 바꿔서 '창업'이라는 말로 좋은 사업인 것처럼 포장해서 재판매하는 것을 혁신적이고 정의로운 일이라고 생각하면, 합리성의 산물인 규제는 졸지에 젊은 창업자를 방해하는 나쁜 규제가 되어버린다. 그리고 이들을 지원하는 정치인은 비슷한 일을 하는 사람들이다.

타다가 좋은 창업 아이템이 아닌 이유는 실제 영업은 택시와 똑같이 하면서 택시 사업이 필요로 하는 면허를 매입하거나 이용하지 않아서다. 만약 택시와 같은 방식으로 영업을 하지 않거나 개인택시 운전자들에게 면허를 매입한다면 타다가 지금처럼 욕을 먹을 일도, 택시기사의 분신 시위가 벌어질 일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타다 입장에서는 택시면허를 매입하는 선택지는 불가능하다. 택시 기사당 1억씩 주고 면허를 사도 100개의 면허면 100억이라는 돈이 드는데, 이 돈을 구하는 게 문제가 아니라 (펀딩을 하면 100억은 쉽게 구할 수 있다. 문제의 초점은 100억에 있지 않다) 투자를 하는 쪽에서 "100억"이라는 돈을 써서 사업의 정당성을 획득하는 일을 혁신적이지 않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타다는 정부가 면허를 사서 나중에 면허의 이름을 바꿔서 타다에게 주라는 우회로를 주장한다.

하지만 정부 입장에서는 택시면허를 세금으로 산다는 부담이 있고 더 큰 문제는, 이후 타다가 면허를 매입하겠다는 약속을 지킬 것인지 의심스럽다는 점이 타다의 제안에 동의할 수 없게끔 만든다. 결과적으로 문제는 혁신적이라는 타다가 좋은 아이템이 아니라는 데 있다. 개인택시와 다를 바 없는 사업을 설명하면 아무도 좋은 아이템이라고 이야기하지 않을 것이고, 타다는 투자를 받기 위해서 택시의 나쁜 점을 나열했을 뿐 자신들이 택시와 근본적으로 어떻게 다른지는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다. 타다의 문제는 잘못된 사업 아이템으로 일단 시작하고 봤다는 점에 있고 그러므로 택시가 사라지지 않는 이상, 면허를 매입하지 않는 이상 타다는 택시업에 밀려서 사라질 것이다. 택시라는 조건을 이용해 승객에게 더 좋은 서비스를 제공하는 기업이 혁신이라는 말을 붙이지 않고서도 살아남는 동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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