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를 맞아


40000힛 달성.
50000힛 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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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일이 되었다. 올해는 저도 다른 사람들이 하는 것처럼 방명록을 만들겠습니다. 혹시 제게 전할 말이 있거나, 용건이 있거나, 아니면 일을 부탁할 경우는, 이 글 밑에 댓글을 달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라인(lerisia)으로도 연락 가능합니다.

올해 목표: 대학원 입학과 공부. 장편 소설을 하나 쓰고, 지면에 중편 이상의 소설을 발표하기. and also...




Philosophical memo



말년의 저작인 On Certainty를 읽고 "일반적 명제 형식에서 명제는 오직 진리 조작들의 토대로서만 명제 속에 나타난다."라는 논고의 구절(5.54.)을 읽으면, 비트겐슈타인이 하는 말이 굉장히 의미심장하게 들린다. 그는 나중에 "진리 조작"이라는 표현을 포기하게 된다. 명제 형식을 삶의 형식으로 바꾸고, (진리 조작을 삭제한 다음에) 토대로서 명제를 축명제로 바꾸면 On Certainty에서 비트겐슈타인이 하고 싶었던 말이 뿅 하고 등장한다. e.g. "삶의 일반적인 형식에서 축 명제는 토대로서 명제 속에 나타난다."
(여기서 토대는 다음과 같다: (믿음의) 토대, (정당화의) 토대, (우리가 그렇게 말할 수 있는) 토대 등등. 그리고 이 토대는 의심할 수 없다는 점에서 명제가 아니다. 차라리 그것은 말을 가능하게 만드는 조건에 가깝다. 축명제라고 명명하는 이유)

논고에서 명제란 곧 세계의 원자의 사실인데, 명제 형식은 그러니까 삶의 형식과도 일치한다. 다만, 논고 끝에서 이러한 생각을 버리라고 비트겐슈타인은 말한다. 그는 자신이 이제까지 전개한 생각의 체계를 전적으로 무의미(senseless)하다고 말하는데 이 무의미라는 말의 해석에 대해서도 가벼운 논쟁이 최근에 있었다. 정리하자면, 내 생각에 비트겐에게 있어 정당화나 진리 조건의 문제는 거의 중요성이 없었다. 언어를 어떻게 사용하는가, 말이 대체 모순이면서 어떻게 설stand 수 있는가, 왜 어떤 사람은 절대적으로 무의미해 보이는 말을 내뱉는가(사적 언어에 대한 대화자와 비트겐슈타인의 논쟁. 철학적 탐구를 참조할 것) 같은 문제들이 훨씬 더 중요했다. 그리고 이것은 윤리적인 문제의식과도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비트겐슈타인을 윤리학자로 이해하는 단초가 될 수 있다.

전기가오리


위 글을 읽었고, 몇 가지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이글루에 적어둔다. 나는 이제 번역모임에 참여하지 않고(개인적인 이유), 따라서 이해 당사자가 아니다.

글에 대한 나의 의견: 전기가오리 번역 모임에 참가했던 사람으로서, 몇 가지 작업에 관련된 지적을 받은 적은 있지만 퇴출된 적은 없다. 그리고 운영자와 번역 작업을 하던 다른 사람 중에서도 퇴출된 사람은 (거의)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여름부터 모임의 원활한 진행을 위해 운영자 임의로 퇴출하겠다는 말이 있었고, 본보기로 울트라노마드 씨가 걸린 게 아닐까. 본인은 부당하다고 느낄 수 있지만 합의를 통해 도출된 결론에 따를 수밖에 없다. 물론 갑작스러운 통보는 나도 부당하다고 생각한다. 통보에 대한 이유설명은 더 자세히 했어야 하고, 다른 구성원들의 의견도 잘 취합해서 "결정문"의 형식으로 보냈어야 한다. 이건 신우승씨의 잘못이라고 받아들인다. 모임이 '점조직'으로 운영되는 이유는 전기가오리의 주 목적이 철학서의 번역 출판이기 때문이다. 결론만 말하면 모임의 대전제를 따라야 한다. 아니라면, 혹은 소전제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다른 모임을 만들어야 한다. 규칙을 어길 수도 있지만 마찬가지로 규칙에 의해 배제될 수도 있다는 것, 그러한 대전제를 이해한다는 것도 규범에 익숙하다는 증거다. 그러니 누군가에게 전기가오리가 실망스러운 모임이 될 수 있지만, 그건 off the records로 해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퇴출되는 사람들이 모여서 공론화를 한다면 그 때는 이야기가 달라질 수도 있다. 아직은 그렇지 않기에 규칙에 따라야 한다고 말한다.

<순간이동자>에 대한 이야기


후일담 같은 이야기다.

사실 나는 듀나가 자신의 소설에서 여성을 그리는 방법에 약간의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이 여성의 긍정적 측면을 그려낸다는 점에서 좋은 페미니즘 소설이 될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많은 점들을 놓치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를테면 일상과 사적 대화. 어제는 뭘 했는지, 뭘 먹고 누구와 대화를 하는지, 친구는 누구를 사귀는지 같은 것들 말이다. 내용과 맞지 않아 삭제한 절 중에는 대학 시절에 사귀었던 친구와 식당에서 만나는 장면도 있었다. 나는 그런 장면들이 소설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스스로를 반영하는 거울로서 예술이 존립할 수 있다면, 비록 그것이 감추어진 치부나 비논리적이고 곤란한 감정이라 아름답지 못하겠지만, 어떤 의미에서 다른 사람도 나를 비추는 거울로 역할을 할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처음에는 그렇게 시작했다.

한 100매 정도를 썼을 때 암초를 만났다. 학기도 바빴고, 아무 것도 쓸 수 없었다. 결국 나는 봄의 초입에 쓴 소설을 여름까지 미룰 수밖에 없었다. 여름에는 공모전의 마감이 있었기 때문에, 마감을 지킬 수 있을 것이라는 작은 희망(동시에 절망)이 있었다. 결국 무더운 여름의 두 달 동안 카페에서 노트북의 열기와 씨름하며 소설을 완성했고, 1고의 분량은 지금보다 20% 정도 많았다. 몇 가지 사소한 내용을 삭제했고, 문장을 다듬었더니 분량은 줄어들었다. 그렇게 쓴 소설을 공모전에 내고 나니 많은 고민들이 단번에 정리된 기분이었다. 그 뒤로 겨울까지는 거의 소설을 쓰지 않았다. 쓸 필요가 없었다는 말이 정확하다. 겨울이 되자 한 편 써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한빛아파트>라는 제목의 소설을 적었다. 여튼, 이 소설을 완성한 일은 내 인생에서 하나의 분기점이었다.

처음에는 듀나가 내게 던진 질문으로 촉발되었지만 끝에 가서는 내가 창조한 소설 자체가 거대한 질문이 되었다. 소설이 내게 던진 질문을 번역하자면, 아마도 이런 느낌이지 않을까. "당신이 알지 못하는, 처음 만나는 존재와 사귈 수 있나요?"—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아직 없다. 난 소설이 특정한 열망을 대변하는 예술이 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데마고그와 프로파간다를 위해서라면, 영화나 만화나 음악이 훨씬 더 효과적이고 대중의 열망에 부응할 것이다. 물론 소설도 그럴 수 있겠지만 그러기에는 내가 다루는 주제가 너무나 민감하고, 불투명한 것들 뿐이다. 결국 기본적으로 삶이란 쉽지 않고—종종 위협적이기도 하며—, 삶 가운데에서 우리가 마주치는 문제들의 해답도 그리 간단하지 않을 거라고 믿는 사람들에게, 그리고 그 사람들을 위해 소설을 쓰고 싶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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