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를 맞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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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일이 되었다. 올해는 저도 다른 사람들이 하는 것처럼 방명록을 만들겠습니다. 혹시 제게 전할 말이 있거나, 용건이 있거나, 아니면 일본어 번역 업무를 부탁할 경우에는, 이 글 밑에 댓글을 달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라인(lerisia)으로도 연락 가능합니다.

올해 목표: 아테스웨이 몽블랑 먹기, 졸업, 장편 소설을 완성 and also...

오늘의 음악: imoutoid 「i의 수식 (Imoutoid's ComplexFunktion Remix)」 (Candy Highway), Ture 「Blast!」




오지환



야구 경기가 없어서 행복한 오늘, 심심한 나는 스탯티즈에 들어가서 엘지 선수들의 이름을 입력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다가 오지환을 검색해 보고 나는 충격을 받았는데, 하나는 2015년의 WAR이 매우 높다는 것(수비 포함해서 6.5정도)이고 다른 하나는 올해의 WAR에서 공격 WAR*이 너무나 낮다는 것이었다. 한번 보자.



2015년의 오지환은 공격(타격 성적)으로만 4.44승을 벌었다. OPS가 8할이면 유격수 치고는 준수하다 볼 수 있다. 이 말은, 대체선수와 비교하였을 때 오지환을 기용할 경우 144경기에서 4.44승을 더 벌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2019년의 오지환은 공격으로 고작 0.68승밖에 벌지 못했다. 46경기를 치른 시점에서 시즌의 1/3이 지나갔으므로, 만약 오지환이 비슷한 흐름으로 타격을 하면 대략 2승 정도를 팀에 줄 수 있다는 말이 된다. 그런데 2승을 위해서 주전 유격수를 기용해야 한다는 것도 이상하다. 왜냐면, 정주현의 WAR을 보기로 하자.


정주현은 대체선수와 다름 없는 WAR*를 보여주고 있다. 스탯티즈에서 보여주는 WAR*이 정확하다면 정주현은 2루에 기용하나 마나 큰 차이가 없는 선수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엘지의 하강세(DTD DTD라고 노래를 부르는 바로 그 내려감...)를 막기 위해서라도 정주현을 2군에 내리고 오지환을 2루에, 백승현을 유격수에 기용하는 것은 어떨까? 오지환은 수비 부담을 덜 수 있고 엘지 입장에서는 백승현을 유격수 자리에서 키울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모 감독은 주전야구가 유일한 정답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으나 이제는 냉정한 선택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p.s. 정우영, 고우석, 차우찬은 제발 관리 좀...

블루보틀, 야구, 글쓰기




0. Anyway, the thing about progress is that it always seems greater than it really is. - Johann Nestroy


1. 블루보틀에 다녀온지 2주 정도 되었을까, 네이버 뉴스에서 "'블루보틀' 상륙에 울고 웃는 사람들"이라는 글을 읽었다. 블루보틀이 있는 건물은 원래 건물주가 21년간 오리고기 식당을 운영하는 세입자에게 권리를 보장하면서, 임대료를 올리지 않고 운영할 수 있게끔 배려해 주었다고 한다. (19년 간 딱 한번 임대료를 인상했다고 하니, 한국에서 보면 월세를 올리지 않았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나 2015년에 건물주가 바뀌고 나서 건물주가 되는 디자이너는 세입자에게 나가라는 통보를 한다. 다른 세입자는 명도소송을 한 뒤에 가만히 말을 듣고 나갔지만, 오리고기 식당을 운영하는 노인 부부는 명도소송을 하고 나서도 끝까지 버티고 있다가 마지막에 가서야 합의를 하고 건물에서 나왔다. 아래는 인용이다.

"ㄱ씨는 “이번 일을 겪으면서 몸이 안 좋아져 병원에 다니고 있다”며 “지금도 건물만 보면 심장이 떨려서 아예 먼 곳으로 이사를 왔다”고 말했다. ㄱ씨가 나가자 건물 리모델링 공사가 시작됐다. 붉은 외벽으로 새롭게 단장한 건물에는 미국 스페셜티 커피 브랜드 블루보틀이 들어섰다. 건물 전체를 사옥으로 써야 해서 임대를 줄 수 없다던 디자이너 측의 설명과 달랐다. 왜 거짓말을 했느냐고 따져 물을 세입자는 없었다. 세입자가 떠난 뒤 성동구는 블루보틀과 지역 상생발전 협약을 맺었다." 출처


2. 김기태 전 기아 감독이 성적 부진으로 자리에서 물러났다. 2017년에는 기아 타이거즈가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할 수 있게끔 지도력을 발휘하고, 2016년부터 2018년까지 3년 연속으로 포스트시즌에 오르게 만든 감독이 10위라는 처참한 성적 부진으로 감독에서 내려온 것이다. 감독 임기의 마지막 날이 되는 5월 16일, 김기태 감독은 더그아웃에 물을 챙기러 들어온 박찬호 선수에게 몇 가지 조언을 해 준다. 그 조언 중에서 인상적인 구절을, 가감 없이 인용해 보기로 한다.

"김 감독은 박찬호의 손을 잡더니 "감독이 싫은 소리를 많이 했는데 그동안 미안했어. 요즘 야구 재미있나"라고 말했다. 박찬호가 "재미있습니다"라고 답하자 프로야구 선수로 성공하기 위한 몇몇 조언을 했다. 김 감독은 "타율에 너무 조급하면 안된다. 항상 100타수씩 잘라서 관리해야 한다. 3할에서 떨어지면 다음 100타수에서 만회하면 된다. 3할에서 떨어지면 급해진다. 다시 올라가려고 스윙이 막 나온다"고 말했다. (중략) 마지막으로 프로 선수의 의식도 주문했다. "프로야구 선수는 진짜 프로가 되어야 한다. 야구장에 나오는 것은 훈련하러 나오는 것이 아니다. 돈을 벌러 나온다. 그런 생각을 하면 준비하는 자세부터 달라진다. 자세가 달라지면 성적도 좋아지고 돈도 많이 벌 수 있다"고 강조했다." 출처


3. 글을 쓰면서도 항상 염두에 두는 전제가 있다. 이 글이 누군가의 감정을 상하게 하거나, 훼손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그러나 누군가의 입장을 옹호하는 글을 쓰게 되면 다른 누군가, 주로 상대편이 된다, 의 입장을 비난하고 감정을 훼손하는 글을 쓸 수밖에 없다. 블루보틀은 마침 비어 있는 넓은 건물에 아마도 저렴한 가격으로 들어올 기회를 잡아챘을 뿐이지만, 실제로 이 건물이 기존 세입자를 비우는 방식은 매우 난폭하고, 배려심 없고, 어떤 의미에서는 한국적이었다. 블루보틀의 무지함이 세입자가 쫓겨난 건물에 들어오게 되었다는 결과를 낳았고, 경향신문은 소위 말해서 '건수를 잡았다'고 생각하고는 블루보틀의 입점을 간접적으로 비판하는 기사를 작성했다. 그리고 김기태 감독의 퇴진을 다룬 기사에서는 마치 김기태 감독이 젊은 선수에게 조언을 해 주면서 프로의식을 가지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바꿔서 이야기하면 억대 연봉을 받는 감독(김기태 감독은 연 5억원을 받았다)이 10위로 팀을 끌어낼린 셈이 되므로 간접적으로 김기태 감독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글쓰기는 철학적 글쓰기에서도 쉽게 발견된다. 이를테면 내가 철학자 A를 비판하기 위한 글을 쓴다고 하면 나는 A의 주장을 논증으로 분석하고 나서 논증에서 문제점을 찾는다. 또한, 나는 A가 다른 분과 학문에서 적절하지 못한 말, 즉 헛소리를 했는지 살펴보고 만약 헛소리를 했을 때는 거기에 대해서도 추가적으로 비판한다. 게다가 철학자 A가 이미 사망한 철학자일 경우에 나의 작업은 훨씬 더 수월해진다. 살아 있는 사람이라면 나의 논문을 읽고 반박할 수 있는 가능성이 언제나 존재한다. 그러나 만약 사망한 철학자라면 나는 쓸데없는 걱정을 할 필요가 없이 자유롭게 비판하면 그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늘 생각한다. "이 글이 죽은 사람의 감정을 상하게 하거나, 의도를 훼손하고 있을까?" 아마 교수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죽은 사람은 감정이 존재하지 않으며 심지어 의도도 가지고 있지 않으므로 당신의 철학 작업은 자유롭게 퍼저나갈 수 있다고. 자유롭게, 하고 싶은 대로 철학하면 그만이라고. 하지만 비트겐슈타인이 <철학적 탐구>에서 인용한 요한 네스트로이의 유명한 구절, "과학적 진보는 언제나 실제보다 과장되어 보인다"는 말은 나의 염려가 어쩌면 중요할 수도 있다고 암시한다. 우리는 지금 시대가 가장 위대하고 가장 훌륭한 진보를 이뤘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이건 착각에 지나지 않는다. 고대의 찬란한 시대를 알지 못하는 중세인은 그들이 가장 신에 가까운 존재들이라고 만족했을지 모른다. 이건 착각이다. 이게 착각이라면, 현대인이 과학적 앎에 관해 가지고 있는 자부심은 얼마나 다른가? 더불어, 과학적 앎을 설명하면서 합리적인 철학의 가능성을 해명하는 분석철학의 자부심은 얼마나 중세인의 그것과 비슷해 보이나? 나는 훌륭한 기자의 글을 읽을 때마다 그런 무시무시한 무지의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현대정신분석


나시모토 우이(이하 나시모토)가 "뒈져버려 PTA"라는 명곡을 2010년 5월에 발표했을 때, 그 전까지는 고등학교의 억압적 시스템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나는, 어떤 의미에서는 큰 감명을 받기는 했으되 하츠네 미쿠가 부르는 노래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서는 생각해 보기를 주저하였다. 지금에 와서야 "주저했다"라고 쓰지만 당시에는 물론 자신의 행동에 대한 이유나,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목적을 도저히 생각해 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안다. 고등학교의 억압적인 구조는 사회 구조를 그대로 모방하고 있으며 사회 구조를 지지하는 근본 바탕은 가부장제에 있고, 이 가부장제는 성욕의 관리와 아기의 재생산을 목적으로 운영되는 작은 삼각형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라캉은 이를 놀랍게도 "외디푸스 삼각형(Oedipus의 프랑스어 발음은 외디푸. S는 보통 생략된다)"이라는 간명한 단어로 표현해 버리는데, 여기서, 삼각형 속에서 남성은 강박증자의 증상을 가지며 여성은 히스테리증자의 증상을 가진다. 그리고 남성과 여성 사이에서 출산한 아이는 상상계의 단계에서 아직 [상상적인] 엄마와 합일화된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스스로의 자아를 정립하고 아버지의 이름(nom du pere) 속으로 들어가서 법을 따르는/지키는 주체가 될 수 없는 상태에 머무른다. 그런데 말이다.


다른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나는 게임 플레이 영상을 즐겨 본다. 최근에는 스즈카 우타코가 생방송하는 <두근두근 문예부!>라는 게임을 플레이하는 모습을 보면서, 개인적으로 큰 감명을 받았다. 무엇에 감명을 받았냐고 물어본다면 크게 두 가지 정도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미국의 게임제작자가 일본 미연시를 모방한 미소녀 시뮬레이션 게임을 만들었다는 점이고, 둘째, 이 게임이 한때 유행하였지만 이제는 사라진 메타-픽션의 내용과 형식을 전유하고 있다는 점이다. 미국인이 게임을 만드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미국에도 오타쿠들이 많고, 일본적인 소재--물론 여기서도 우리는 한 가지 차이점에 주의해야만 한다. 미국인이 일본인을 바라보는 시선은 어디까지나 타자가 알 수 없는 대상을 파악하기 위해서 바라보는 시선이라는 것이다. 일본인이 일본의 학교를 바라볼 때, 이와 같은 절대적으로 타자적인 시선은 존재하지 않는다--를 사용하는 것은 좋은 수단으로 성립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메타-픽션의 영역에 들어서게 되면 한 가지 의심은 해 볼 수 있다. 바로 이 게임이 누구를 위해서, 누구의 욕망을 드러내기 위해서 처음부터 끝까지 제작되었는가 하는 문제이다.

게임이 역겹다거나, 무섭다거나(실제로 무서운 이미지나 문자들이 이 게임에서는 시도때도 없이 등장한다) 현실을 겨냥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메타적이라거나 하는 점들이 내게는 그리 중요해 보이지는 않는다. 그건 어디까지나 게임을 즐기는 데 부가적으로 도움이 되는 요소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게임의 메타적 시선에서 주체의 욕망을 경험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나는 이 게임의 구조가 굉장히 흥미로웠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다. 사랑에 대해서, 명백하게 이 게임은 사랑이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사랑의 실패로 제시되는 이유는 문예부 주변의 환경, 게임 안이라는 한계, 불행한 과거라는 사실들이다. 하지만 나는 묻고 싶다. 사랑의 실패는 라캉에 따르면 주체가 상징계에서 실재계로 넘어가지 못하고 자신의 욕망을 끝까지 추구(혹은 분석)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주체에게 그 원인이 돌려진다. 게임도 마찬가지다. 게임 속 주인공이 사랑을 이루지 못한다면 이는 다른 이유가 있는 게 아니라, 플레이어가 조작을 잘못했거나 상대방이 플레이어가 조작하는 주인공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지, 다른 이유가 있는 게 아니다. 게임의 내부라서, 과거가 불행해서 사랑에 성공할 수 없다는 건 주체의 핑계에 불과하다. 나는 이를 현실에서 주체가 사랑에 실패하게 되는 은유로 파악했다.


즉, 이렇게 말할 수 있다면 나의 도식은 다음과 같이 주어진다. 현실에서 사랑에 실패하는 주체가 존재하고, 그 주체가 만들거나 이야기하거나 플레이하는 게임 속의 주체가 존재한다. 주체는 타자와의 사랑에 실패하였을 때 온갖 핑계거리를 찾으면서 그 사랑이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나열하려는 욕망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내가 [오직 두 사람만 알 수 있는 바로 그 시간에서] 그 때 그렇게 하지 않았으면, 그 애가 나를 좀 더 이해해 줬더라면, 환경이 조금 더 나았더라면. 하지만 라캉의 말을 따른다면, 우리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라캉 뿐이다, 이런 핑계는 주체가 욕망을 끝까지 추구하지 못하였다는 사실에 대한 구차한 변명들에 불과하며, 오브제 아(objet a)를 넘어서서 타자가 거주하는 실재 그 자체로 나아가지 못한 사실에 대한 뒤늦은 후회들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정신분석의 준엄한 심판을 기다리고 있다. 한편에는 라캉과 분석가가 있고, 다른 한편에는 판결을 내리는 초자아가 있다. 증인은 스스로 변호사가 되어서 자신의 실패한 사랑에 대해서 변명해 보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감정에 호소하는 논증으로 구성된다, 판결은 대체로 그가 잘못 사랑했다는 것으로 내려진다. <두근두근 문예부!>에서 이것은 주인공의 사랑을 방해하던 모니카가 스스로 사라지면서 게임을 없애 버리는 결말로 주어진다. 그런데 말이다. 여기서 멈추면 좋겠지만 한 가지를 더 짚고 넘어가야만 한다.

법은 법일 때 법으로 기능할 수 있다. 말을 풀어서 써 보자. 법(아버지의 이름)은 자율적일 때 규범으로 기능할 수 있다. 법은 자율적이어야 하고 타율적이어서는 안 된다. 라캉에게 이는 스스로 법을 정립하는 주체를 요구하는 실재계의 요구를 통해서 구체화된다. 여기서 라캉은 <실천이성비판>의 칸트와 반갑게 재회한다. 또한, 법은 단순히 율법이어서는 안 되고 언어 공동체 속에서 규범으로 올바르게 기능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나시모토가 욕하는 PTA가 일본인들에게 욕을 먹는 이유는 설득력이 없고 합리적이지 않은 규범이, 단순히 그렇게 서술되어 있다는 이유로 인해서 교육 현장에서 무분별하고 숙고와 사리 없이 적용되고 있어서이다. 한국의 현실도 마찬가지다. 라캉에게 이는 법을 지키는 주체가 존재하지 않는 무법적이고 초법적인 상황에서 나쁜 법이 원래의 법을 대신하게 되는 사태를 가리킨다. 아버지는 외디푸스 삼각형 속에서 상상계와 실재계를 동시에 억압하고 있다는 뜻에서 나쁘지만, 새로운 아버지는 외디푸스의 삼각형을 지키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으면서 상상계와 상징계에게 과도한 역할을 요구한다. 아버지가 갔더니 더욱 나쁜 아버지가 오는 이런 현실 속에서 나시모토의 외침은 누구의 귀에 들어갔을까? 개별 주체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욕망을 똑바로 바라보고 실재계로 진입하려는 용기를 잃지 않되, 법-없음의 상황에서 스스로의 법을 제작하려는 사려 깊은 태도도 함께 지니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라캉은 바로 이런 말을 하기 위해서 정신분석을 정신분석답게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Make psychoanalysis great again!) 그리고 프로이트의 교훈을 올바르게 음미하는 일은 21세기를 살아가는 분열적 주체인 우리 자신에게 있어서도 유의미한 일이다. 적어도, 사랑이 파탄하는 아비규환의 폐허 속에서 타자와 공존하며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찾는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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