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를 맞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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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일이 되었다. 올해는 저도 다른 사람들이 하는 것처럼 방명록을 만들겠습니다. 혹시 제게 전할 말이 있거나, 용건이 있거나, 아니면 일을 부탁할 경우는, 이 글 밑에 댓글을 달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라인(lerisia)으로도 연락 가능합니다.

올해 목표: 학회 참석하기, 지면에 중편 이상의 소설을 발표하기. 야마노우에 호텔에서 숙박하기. and also...

오늘의 음악: 오리사카 유타 「헤이세이平成」, 오자와 켄지 「굳센 기분 그리고 사랑強い気持ち・強い愛」 (자막은 魔法的 버전)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 (2018) 감상


** 스포일러 있습니다. **


영화를 끝까지 보고 영화관에서 나왔을 때, 나는 한 가지 위화감을 느꼈다. 그리고 위화감을 정확한 언어로 묘사할 수 없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건 나보다 먼저 극장에서 나온 할머니, 할아버지가 할머니는 만화 같다고 말하면서 할아버지는 좋았다고 말했기 때문만은 아니고, 전체적으로 이 극장만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남성 관객이 여성 관객보다 많기 때문도 아니며, 아니 어쩌면, 거기서부터 시작된 의구심일지도 모르겠지만, 나의 위화감은 집으로 돌아와서 영화의 스토리를 반추하기 전까지는 구체적인 형상을 띠지 못했다. 그래서 조금 더 생각해 보았다. 그러다 문득, 몇 년 전에 읽었던 배명훈의 소설 『타워』가 떠올랐다.

나는 외쳤다. 유레카!

아르키메데스가 유레카를 외친 이유는 말 그대로, 원자번호가 서로 다른 금과 은의 비중을 왕관의 비가역적인 손실 없이 측정하는 '방법'을 깨달았기 때문이지만 나의 유레카는 그러한 쾌락과는 맥락이 달랐다. 내가 외친 유레카! 는 배명훈의 소설이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라는 영화의 위화감을 설명할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을 제공하기 때문이었다. 아르키메데스는 실재(비중값)를 물(H2O)이라는 매개를 통해서 정확히 갈라 내었지만, 나는 현실보다는 오히려 사적인 느낌에 가까운 위화감을 소설이라는 매개를 통해서 갈라 내었다. 한 사람은 실재를 보여주는 데(carving nature at its joints) 성공하였지만, 나의 경우 현실은 어느 곳에서도 발견할 수 없었고, 이런저런 말들을 그 위에 덧붙일 따름이었다.

영화로 돌아오자. 이 영화는 크게 세 단락으로 나뉘어질 수 있다.
1) 주인공(시가 하루키)이 여주인공(야마우치 사쿠라)을 만난다.
2) 둘은 여름 내내 신나게 논다. 여주인공이 곧 죽을 운명이라서 이런 일이 가능했다.
3) 살인 사건으로 여주인공이 죽는다. 나는 유언을 보고 진실을 깨달으며, 그녀의 친구와 교제한다. 성묘도 한다.

솔직히 말하자. 나는 영화에서 사람들이 기대하는 바가 2번과 3번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평범한 사람들은 사건을 원하며, 사건들 사이에서 제시된 복선이 회수되기를 원한다. 그러나 모든 게 무로 돌아가지 않기를 바라며, 이것은 3번을 원하는 욕망을 추동한다. 영화나 문학이나 만화가 대중의 욕망을 반영하는 예술로 존립한다면, 그에 종사하는 사람의 목표는 자신의 욕망(작가로서의 욕망)이 대중의 욕망(쾌락 원칙과 논리)이 합치하는 사태이다. 이를테면 배명훈의 타워가 그렇다. 타워는 SF소설이라는 소개문을 달고 있으며, 서점의 소개문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가로세로 변이 각 5킬로미터에 높이는 2,408미터. 이 674층의 초고층 건물은 타워라고 부르지만, 사실은 국가다. 작가는 이 가상의 공간에 '빈스토크'라는 이름을 부여하였고, 빈스토크에서 일어나는 여섯 편의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준다. 정치, 경제, 외교, 전쟁, 연구, 연애……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사건들이 19층 비무장지대에서부터 670층 전망대에 이르기까지 빈스토크 곳곳을 샅샅이 훑으며 펼쳐진다. 600층이나 700층짜리 건물은 누구나 생각해 낼 수 있다. 중요한 건 누가 보아도 그 건물을 674층짜리로 믿게끔 만드는 작업이다. 배명훈은 우리가 일상 속에서 느끼는 것, 자신이 발 딛고 선 한국 사회를 살아가면서 맛볼 수 있는 리얼한 감정이나 감각에서부터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그의 리얼한 상상력은... 장난이 아니다.


내가 처음 타워를 읽은 순간을 똑똑히 기억한다. 그 때 나는 이제 막 3학년이 된 21세였고, SF와 판타지를 비롯한 장르 문학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어린 소년이었다. 그때까지 한국 문학을 전혀 읽지 않고 어슐러 K. 르귄, 로버트 하인라인, 로저 젤라즈니, 아서 클라크, 필립 K. 딕 등의 이름과 친하게 지냈던(때로는 일본 소설과 어울리기도 하였던) 나는, 한국 SF 소설을 읽어 봐야겠다는 생각으로 도서관 서가에서 타워를 발견하고, 그것을 펼쳐 보았다. 이 책은 여섯 개의 단편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정확한 기억은 없지만 내 기억에 4개 정도 읽고 그만 읽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장난이 아니"라고 소개문에는 적혀 있었지만, 나에게 타워라는 소설은 그저 머리 좋은 작가의 사고 실험 속 장난처럼 보였다.

왜 그랬을까. 그 때는 재미없다는 한 마디를 하고 도서관을 나왔지만, 지금은 몇 가지 이유가 떠오른다. 첫째, 배명훈의 소설에서는 살아 있는 인간을 만날 수 없었다. 모든 작가들이 그런 건 아니겠지만 보통 작가들은 현실에서 만난 사람을 소설 속에 집어넣는다. 그것이 작품을 제작하는 데 있어 필요불가결하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배명훈에게 현실의 인물은, 그의 소설 속 인물과 마찬가지로, 가능세계의 한 가지 가능성에 지나지 않는다. 타워가 호의적인 독자들 사이에서 현실적이라고 말해지는 가장 큰 이유란, 정말로 소설 속에서 삶을 영위하는 인간의 그림자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저 그런 현실이 우리 현실처럼 있을 법하기 때문이다. 독재자가 없는 완전무결한 지구란 존재하는가? 현실 세계에서는 없지만, 다른 가능세계에서는 있을 수도 있다. 타워는 있는가? 타워가 있는 세계가 여기 있다.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 와우... 장난이 아니다.

둘째, 배명훈의 소설 속 인물은 과도할 정도로 정합성에 집착한다. 예를 들어 어떤 사건 A가 발생하였다고 하자. 그러면 통상적인 소설 속에서 사건이 전개되는 과정은 다음과 같다.

A - B(주인공들이 소개되거나 기타 설정이 나온다) - A' - B' - C - A'' - C' - A''' - D - E (음악 코드 같지만 뭐 그렇다고 치자.)

하지만 배명훈의 소설 속에서는, 이 구성이 거꾸로 선 물구나무처럼 전개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B - A - B' - A' - C - A'' - D - E - A''' (사건의 교훈)

그러므로, 근대 문학을 충실히 독해한 독자들은 배명훈의 구성에 적잖은 놀람을 표현하게 된다. 이 감상문이 한 가지 좋은 예시일 것이다. 그의 놀람에는 이유가 있고, 그가 말하는 것처럼 "상당히 진부하게 느껴졌다. 그 외 단편들 역시 기대 이하였다. 그래, 솔직하게 말해서 작품마다 생각해볼만한 구석 한두 군데 '갖추고는' 있었다. 하지만 그 뿐이었다. 전체적으로 이 작품에서 내가 건질 수 있었던 것은 작가의 작품이 앞으로 더 나아질 수 있으리란 '가능성'뿐이었다. 작품이 가진 감동 자체는 꽤나 미진했고 평범했다." 쉽게 말해서, 배명훈은 근대 문학을 거꾸로 보면서 소설을 쓰는 작가이다. 물론 그게 옳거나 그르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진리가 없다면, 모든 차이는 스타일의 차이로 환원될 수 있을 테니까.

내가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를 보면서 느낀 점도 정확히, 배명훈의 소설에서 느낀 점과 마찬가지였다. 영화 속에서 죽음, 불치병, 청춘, 연애, 자아, 친구, 성장 등의 문제가 등장하지만, 그 어떤 것도 내게 유의미하거나 본질적인 말을 하지 않았다. 특히 후반부에서 여주인공이 가슴을 칼로 찔려 사망하는 장면에서는 더더욱 그랬다. 앞에서 한 차례 살인이 벌어진다는 암시가 등장하기는 하지만, 그 복선을 회수하기 위해서 한 사람을 수명보다 일찍 죽인 것 치고는, 너무나 썰렁했다. 마치 타워의 한 단편에서 뇌물로 바쳐진 고급 술이 개 앞으로 가는 게 허무한 것처럼, 주인공이 책(공병문고)을 읽어도, 핸드폰을 보고 울어도 허무했다. 당연히 주인공의 입장에서는 슬프고 세계가 무너지는 일일 것이다. 그런데, 관객의 입장을 생각해 보자. 그래서 췌장은 어디로 갔는가? 췌장은 어린 왕자의 행성에 묻혔는가, 아니면 발사되기를 기다리는 총이지만 알고 보니 탄약이 없었나. 훌륭한 문학이라면 이런 가능성을 생각해 보는 것도 유의미할 것이다. 문제는 원작이 그 정도로 훌륭하지 않다는 데 있다.

이제 영화관에서 나오면서, 내가 들었던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대화는 모든 글을 한 마디로 압축한 것처럼 들린다.
할머니 "이런 게 만화라서 그래."
할아버지 "음. 그래도 재미있었네."
할머니 "허허. 당신이 그렇지."
배명훈의 타워가 있는 행성과 어린 왕자의 행성이 하나의 항성 주위를 도는 행성계 가운데에서,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는 우주선 속에서 나는 스마트폰을 열어서 누군가의 감상을 읽는다. 방금 본 영화가 재미 없었기에 그러는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겠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왜냐면 자신을 대변하는 유일한 글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 글은 이렇게 끝난다. "250만 부나 팔릴 작품인지, 도대체 그런 작품인지 말이다."

넋두리



사람들이 부담스러운 것이 아니라, 나를 사람들이 부담스러워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에 갔다가 가족과 양꼬치를 사 먹고(여동생은 왜 이렇게 케이팝을 좋아하는지 모르겠다!), 저녁에 마이조 오타로가 쓴 『私はあなたの瞳の林檎』를 보고는 자기 전에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아쉽게도 못 읽었다. 그래서 다음 날 집으로 오면서 단편 중에 「ほにゃららサラダ」라는 아기자기한 이야기를 읽었다. 보통 마이조 오타로라고 하면 연기, 흙 혹은 먹이나 아수라 걸, 곰의 장소, 등등을 거론하는데, 나는 마이조 오타로가 쓰는 연애와 사랑 이야기도 전자를 좋아하는 이상으로 좋아한다. 이 단편집은 굳이 말하자면 전작 『好き好き大好き超愛してる』에 가까운 테이스트가 느껴진다. 연애 이야기면서 동시에 자아성찰과 하고 싶은 일, 노력, 재능에 대한 이야기를 담담하면서도 예리하게 그려내고 있다. 내가 이런 소설을 읽으면서 언제나 느끼는 점이란, 내가 마이조 오타로처럼 글을 쓸 수는 없다는 사실과, 그리고 그렇게 글을 쓰지 않더라도 좋은 글을 쓸 수 있다는 근거 없는, 소재를 알 수 없는 자신감이다.

델문도 쿠폰(2회차)도 이제 절반이나 쌓였고, 합정역 메세나폴리스에 있는, 정말 친애하는 감정을 몇 마디 말로는 표현할 수조차 없을 만큼 사랑하고 또 사랑하는 일리 카페의 쿠폰도 벌써 네 개나 모았다. 예전에는 카페에서 책을 읽거나 공부를 하더라도 쿠폰 열 개를 못 채워서 한 번도 보너스 드링크를 마신 적이 없었는데--델문도는 50칸을 다 채우면 5000원 할인을 해 주기 때문에 음료 한 잔을 공짜로 주는 방식과는 다르다--, 앞으로 시간이 날 때마다 합정역에 들러서 밥을 먹고 책 한 권을 들고 일리 카페에 놀러 가야겠다는 다짐을 한다. 일리 카페에서는 다른 프랜차이즈 카페와는 다르게 재즈 음악과 블루스를 틀어 준다. 그런 점도 훌륭하고, 합정역으로부터 걸어서 쉽게 갈 수 있다는 점도 훌륭하다.

이번 소설에서도 다루어진 소재이기는 하지만, 좋아하는 일을 한다는 것. 이것은 축복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잘 하는 일을 한다는 것도, 우리는 만화경 같은 삶 속에서 흔히들 착각하지만, 축복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의 삶은 선물받은 것("es gibt" = gift)이라는 하이데거의 말처럼, 축복은 우리가 살아있다는 사실 그 자체에 대해서 진정으로 감사할 때 모습을 드러낸다. 살아 있는 가운데 노동을 하고 밥을 먹고 영화를 보고 친구와 대화를 나누지만, 살아 있지 않다면 그 모든 것들은 전부 컴컴한 무 속에서나 있거나, 혹은 아예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있을 것이다. 소설 속의 주인공이 진정으로 감사를 표현해야 하는 대상은, 하이데거의 교훈을 잘 생각해 본다면, 자신의 가족이나 친구들이 아니라 자신을 창조한 소설가일 것이다. 우리는 아름다운 세계와 함께 나라는 유일무이한 존재, 육신과 영혼으로 말하는 존재를 준 소설가에게 깊은 감사를 표하며, 그는 삶의 기쁨이라는 작은 선물을 천사들이라는 우편배달부에 실어 보낸다. 그러므로 천사들이 건네 주는 선물을 놓치면 안 될 일이다.


벌써 11월 말이다. 선물처럼 다시 없을 겨울이다.

memo: 양상 논리에서 해석에 따른 무한한 세계 증명

proof. 만약 세계에 대한 적법하며 유한한(유한 개의) 해석이 존재할 경우, 적법한(공허하지 않은) 무한한(무한 개의) 해석이 존재 가능하다.
(해석은 나이브하게 이야기하면 세계의 원자명제들의 합집합과 같다. 하지만 의미론적으로 표상주의와 반표상주의를 모두 포괄하려면 해석이라는 명칭이 더 중립적이라서 부득이하게 선택하였다.)

lemma 1. 해석 집합 P = {P1, P2, ... Pn}는 변환Ω을 거칠 경우 해석 집합 Q = {a1, a2, ... , an}과 동치이다.

lemma 증명.
해석 집합 P는 P1 & P2 & ... & Pn = \varnothing 일 경우, 공허한 해석 \varnothing 를 갖는다. 이는 전제와 모순되므로 거짓이다.
따라서, P1 & P2 & ... & Pn = m인 최소 해석 m이 존재한다. 이제 최소 해석을 제거하는 변환 Ω를 생각하자.

Ω(P, Q): P = {P1, P2, ... Pn} = {m+a1, m+a2, ... , m+an} = {a1, a2, ... , an} = Q

P에 Ω(P, Q)를 가할 경우 P = Q이다. (역은 성립하지 않는다.) 증명 끝.

이제 Q의 성질을 생각해 보자.
Q는 적법한 해석이 아니지만, 예를 들어 k(m과 k는 서로소이다. 즉 m & k = \varnothing 이다.)를 더할 경우 적법한 해석이 될 수 있다. 변환
Ω(R, Q)을 생각하자.

Ω(R, Q): Q = {a1, a2, ... , an} = {k+a1, k+a2, ... , k+an} = {R1, R2, ... , Rn} = R

Q에 Ω(R, Q)를 가할 경우 Q = R이다. 한 가지 주의할 점은 변환이 비대칭적이므로, P = Q, Q = R이라고 해서 P = R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는 Ω(P, R)에서

Ω(P, R): P = {P1, P2, ... Pn} = {m+a1, m+a2, ... , m+an} ≠ {k+a1, k+a2, ... , k+an} = R, Ω(P, R) → 
임을 보이는 것으로 충분하다.

우리는 집합 P에서 변환을 거쳐 집합 R이 나타남을 보였다. 마찬가지로 m & k & l= \varnothing 인 집합 S를 생각할 수 있다.
서로 다른 가능한 원자명제의 수는 무한하므로, 역시 서로소인 최소 해석의 수도 무한하다. 그러므로 변환을 통해 무한한 집합을 만들어낼 수 있다.
따라서 해석 집합 P가 존재할 경우, 적법한 무한한 해석 집합이 존재 가능하다. Q. E. D.

p.s. 이는 (주로 데이비드 루이스의) 양상 실재론에서 부담으로 작용한다.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라고 말할 수 있다.
첫째, 세계에 대한 적법하며 유한한 해석이 존재한다는 건 자명하다. 그리고 proof에 따라 무한한 해석이 존재하다는 것도 자명하다. 이는 양상 실재론이 무한한 세계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실을 함축한다. 오컴의 면도날에 의해, 존재론적으로 무한한 세계는 명백한 이론의 부담이다.
둘째, 양상 의미론적으로 우리의 세계를 잘 반영하는 해석 집합 P가 존재할 수 있다. P가 우리 세계의 가능세계들의 집합이라면 성립한다. 그러나 앞서 말한 바에 따라 최소 해석 m이 존재하는데, m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자세한 설명은 아쉽게도 생략한다) m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면 역시 우리의 세계를 잘 반영하는 해석 집합 P가 무엇인지도 알 수 없다. 따라서 모순이며 결론적으로, 의미론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양상 실재론은 반표상주의와도 충분히 양립 가능한 양상 허구론과 비교하였을 때 이론적인 장점을 가진다고 말할 수 없다.

상기의 두 가지 이유에 의해서, 양상 실재론이 양상허구론에 비해 존재론적으로, 의미론적으로 나은 이론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2018. 11.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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