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를 맞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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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일이 되었다. 올해는 저도 다른 사람들이 하는 것처럼 방명록을 만들겠습니다. 혹시 제게 전할 말이 있거나, 용건이 있거나, 아니면 일을 부탁할 경우는, 이 글 밑에 댓글을 달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라인(lerisia)으로도 연락 가능합니다.

올해 목표: 학회 참석하기, 지면에 중편 이상의 소설을 발표하기. 야마노우에 호텔에서 숙박하기. and also...

오늘의 음악: 오리사카 유타 「헤이세이平成」, 오오누마 파셀리 「replay/flower」 (flower는 보컬로이드3의 음원 캐릭터)





잡스러운 인간


한국에서 생활을 하다 보면 어쩔 수 없이 물건을 사고 팔 일이 생긴다. 어제 저녁에는 내가 올린 물건을 사고 싶다는 문자가 와서 친절하게 답장을 했더니, 갑자기 시비를 거는 것이다. (내 말을 못 이해했으면서 자기 주장을 우기는 걸 보면 한국인의 문해율이 절망적으로 낮다는 뉴스 기사가 떠오른다.) 신사적으로 대응하려고 노력했지만, 그가 멍청하다는 사실에 화가 나서 나를 위해 할 필요가 없는 말들을 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런 사람은 그냥 밥맛이라고 생각하고 무시해 버리면 그만이지만, 물건을 팔고 싶었기에 친절하게 대한 게 모든 일의 화근이었던 것 같다. 앞으로는 급하더라도 돌아가자, 잡스러운 인간은 무시해 버리자고 생각한다. 요즘은 구글 새로운 창에 나의 인생에서 남은 시간을 표시해 주는 위젯을 달았는데, 인간의 전체 삶을 3만 일이라고 가정한다면 나에게 주어진 남은 삶이 이제 21000일 정도밖에 없었다. 21000일 중에서 화를 내는 날을 하루라도 줄이는 게 내 삶에서 가장 중요한 목표라면, 행복의 장소를 위해서라도 가급적이면 한국인 진상들을 상대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겠다. 이제부터 정말로, 사심 없이 말이다.

1.8.



<리즈와 파랑새>는 "고마워?"라는 의문형이 두 번 반복된다. 첫 번째는 미조레가 노조미에게 파랑 깃털을 선물받았을 때, 그리고 두 번째는 노조미와 미조레가 함께 교사를 내려갈 때 미조레가 노조미와 대화할 때이다. 두 번의 "고마워?"는 학교라는 성스러운 장소의 문을 열고 닫는 주문이자 열쇠이다. 왜 주문인가? 미조레에게 있어 음악은 노조미가 이끌지 않았다면 그 속으로 침입하는 일이 불가능한 미지의 영역으로, 이런 비밀스럽고 성스러운 장소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보통의 방법으로는 불가능하다. 미조레가 선물받은 파랑 깃털은 그러므로 자신을 위한, 오로지 자신만을 위한 낙원의 출입구다. 즐거운 낙원도 둘의 운명 속에서 예정되어 있는 사건이 벌어진 후, 선악과를 먹고 난 뒤에는 내려가지 않으면 안 되는 지(≠미지)의 장소가 된다. 음악대학에 진학하는 미조레는 이제 낙원에서의 즐거운 생활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며, 자신을 낙원으로 인도하고 풍경을 가르쳐 준 노조미(=천사)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표현하고 싶어한다. 둘은 낙원에서 추방 당할 운명에 처해 있다. 그러나 마지막 장면에서 미조레는 추방이 비극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낙원 속에서 더 큰 삶의 기쁨을 발견했고, 무수한 아름다운 선율 속에서도 잊어버리지 않을 사랑을 발견했으며, 감사의 표현으로도 부족할 만큼 사랑이 위대함을 깨달았기에. 그래서–바로 그 사랑이 대신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에서–감사의 표현은 완결되지 않은 의문형 "고마워?"일 수밖에 없으며, 미조레의 따뜻한 말은 자신의 사랑, 곧 존재에 대한 감사의 표현임과 동시에 낙원추방이라는 슬픈 사실 앞에서 낙원의 문을 닫는다는 선택을 하였다는 증거로 나타나는 것이다. <리즈와 파랑새>는 바로 그러한 존재의 존재를 증언하는 아름다우면서 동시에 아픈 영화다.

寝ても覚めても(한국판 제목 아사코 I&II)잡감


<로마> 좋은 영화이긴 했으되, 결점이 없기 때문에 오히려 매력적이지 않은 작품이었다.

오히려 상상마당에서 <아사코>를 보고 나오자 물밀듯이 밀려오는 감동에 잠시 말을 아꼈다. 건물 천장은 유리 거울처럼 오며 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아름답게 반사하고 있었는데, 나는 아래에서 위로 반사되는 나의 얼굴, 포켓에 집어넣은 두 손과 옷깃, 흔들리면서 유리 너머로 사라지는 평범한 사람들의 순진한 얼굴을 오래도록 지켜보았다. 아사코와 료헤이는 아무 말 없이 오사카 시내를 흐르는 샛강을 응시한다. 강물은 더럽고, 구름낀 하늘은 흐리며 두 연인의 미래는 불투명하다. 연인의 시선을 마주보는 우리가 더러운 강물처럼 흘러가는 거 아니냐며, 감독은 묻고 있는데, 그보다는 아사코가 바다에서 보았던 희망에 내기를 걸고 싶다.

하마구치 류스케는 일부러 영화 속에 균열을 집어넣는다. 폭발물 해체 처리반이라도 된 것처럼 돌발적인 사건을 집어 넣고, 그 속에서 아사코가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폭탄을 해체하는지를 지켜본다. 마지막에 진땅을 찾는 아사코의 손길은 그러므로 재결합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던져진 폭탄을 회수하는 것에 가깝다. 그럼 폭탄의 이름은 무엇인가? 동일본대지진, 후쿠시마? 틀렸다. 사실 감독은 아사코가 료헤이를 처음 만나는 장면에 이미 힌트를 숨겨 놓았다. 아사코는 료헤이를 보고 여러 가지를 묻지만, 료헤이는 그녀의 갑작스러운 물음에 당황스러워한다. 사실, 여기서부터 이미 아사코의 균열이 시작된 것이다.

아사코는 이미 료헤이의 존재에 관심이 없다. 그녀의 눈은 사라진 바쿠에게 향해 있었으되 대상을 사랑하는 일에 실패한다. 왜냐면 바쿠는 스스로 모습을 감추고 아사코의 앞에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제 료헤이를 만나는 아사코의 문제는 한 문장으로 압축된다. 그것은 이렇다: 모르는 사람과 사랑에 빠지는 일은 가능한가? 우리가 아는 사랑의 역설은 모르는 사람이라면 그를 알 수 없기 때문에 사랑에 빠지는 것도 불가능하다는 것이지만, 어쨌든 결과적으로는 사랑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아사코는 료헤이의 얼굴을 보고 사랑에 빠졌으되, 그 사랑은 바쿠를 향해 있으므로 눈은 대상을 지나쳐버린다.

바쿠가 나타났을 때 아사코가 그의 손을 잡은 이유는, 겉으로 보면 아사코가 바쿠를 잊지 못해서 그를 따라간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바쿠라는 폭탄(爆弾)을 해결하기 위해 아사코가 어딘가로 가야 한다는 의미가 숨겨져 있다. 그녀는 센다이로 향하고, 바쿠와 헤어진 뒤에 방파제를 기어 올라가서 바다를 바라본다. 아사코가 유일하게 대상을 자신의 시선으로 바라보는--적어도 극중에서 제시되는 것만 보면--장면은 센다이 근처에서 자원봉사를 할 때이다. 바다는 그녀의 고향이기도 하고, 동시에 많은 사람들을 재해 속으로 몰아넣은 원흉이기도 하다. 그러나 바다에게는 죄가 없으되 이는 사람에게는 죄가 없다는 것이다.

아사코는 자주 "본다." 자신을 바라보면서 사랑에 빠진 눈을 하고 있는 료헤이를 보고, 루게릭 병에 걸려서 병상에 누운 친구를 보고 사진전에서 사진을 바라본다. 바쿠를 만나 사랑에 빠진 건 그녀였으되, 마지막 장면에서 관객은 진땅을 찾고 료헤이에게 고양이를 받아 드는 그녀를 바라보면서 스스로에게 묻는다. 그녀의 사랑은 인류 전체를 향해 있었던 거냐며. 이제 마지막 신은 전혀 다른 의미를 품고 우리를 찾아온다. 세파에 시달리는 평범한 존재로서 우리 자신이 더러운 강물이었던 게 아니라, 대지진이 일어날 때 쭈그려 앉아 있던 사람을 도우고 노숙자에게 묻기를 주저하지 않은 료헤이의 행위처럼, 더럽지만 숭고한 스스로를 발견하는 순간이 찾아온다. 아사코는 바쿠와의 사랑, 헤어짐 그리고 료헤이와의 사랑이라는 숭고한 경험을 통해 비로소 강물을 흐르는 강물 그 자체로 응시하는 일이 가능했기에, 영화의 진정한 주인공은 아사코이며 그녀가 진리를 깨닫게 되는 모든 장면들마다 폭탄이 터질 것만 같은 아슬아슬한 긴장감을 느끼는 것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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