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를 맞아



글을 재밌게 읽으셨나요? 만약 제게 후원을 해 주고 싶으시다면 비트코인: 1LDi1ZRw4DkFC5pKHCpXoWxzptSWujzkiW 이나 아래에 링크되어 있는 페이팔로 후원해 주시면 됩니다. 감사합니다.


40000힛 달성.
50000힛 달성.
60000힛 달성.
70000힛 달성.


1월 1일이 되었다. 올해는 저도 다른 사람들이 하는 것처럼 방명록을 만들겠습니다. 혹시 제게 전할 말이 있거나, 용건이 있거나, 아니면 일을 부탁할 경우는, 이 글 밑에 댓글을 달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라인(lerisia)으로도 연락 가능합니다.

올해 목표: 학회 참석하기, 지면에 중편 이상의 소설을 발표하기. 야마노우에 호텔에서 숙박하기. and also...

오늘의 음악: 헤쿠토파스칼(헤쿠와 파스칼) 「Break These Chain」, 험버트 험버트(Humbert Humbert) 「힘내라 우리 형」




천박함에 대하여



트위터에서 돌고 있는 짤방을 가져와 보았다. 예전에도 공책에 적힌 비슷한 짤방을 보았던 것 같은데, 이런 종류의 악랄함은 유행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생명력을 유지하는 것처럼 보인다. 마치 몸 속에서 퍼지는 암 같다. 진짜 천박하구나... 게다가 사실과도 다름. (공장에서 일하는 숙련직이 대졸 사무직보다 돈을 더 버니까) 문방구 공책도 공장에서 만들었을 텐데 저거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왜 이렇게 사람들이 천박해졌는지 모르겠다. 옛날에는 그래도 일을 하는 사람에게 최소한의 존중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는데, 이제는 모든 일에 값을 매기고 한 가지 기준으로 평가한다. 노동자를 존중하지 않고 예술가를 무시하는 나라의 말로는 엑소더스로 인한 멸망 말고는 없지 않나 뭐 생각합니다. 천박함도 정도껏 해야지 각자의 분야에서 능력도 없이 막 나가는 인간들이 TV에 나오고, 그리고 그런 쓰레기같은 방송을 보는 아이들이 어른들의 왜곡된 가치관을 스펀지처럼 받아들여서 학습하고, 악순환이다.

어떤 특정한 인간을 존중하지 않고 무시하는 사회의 말로는, 아무도 누군가를 존중하지 않는 지옥 같은 사회일 것이다. 그런 사회에서 타자의 존중을 얻는 한 가지 방법은 많은 돈을 가지고 있는 것인데, 왜냐면 오직 돈만이 한 사람의 생사를 좌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당신의 생사를 쥐고 있는 사람에게 표현하는 존중은 진짜 존중이 아니라, 그 사람으로부터 삶의 권리를 얻기 위해 일시적으로 비굴해지는 가짜 존중이다. 이런 사회는 박권일이 묘사한 대로 "노력의 동기가 탁월성의 추구에 있는 게 아니라 멸시의 공포에 있는 사회다. 그런 사회에서 인간은 대체로 함께 참담해져 버리는 것이다." 천박함은 다른 곳에 있지 않고, 인생을 성실하고 참되게 살아가는 누군가를 무시하는 가치관 속에 있다. 즉, 말의 힘이 사라지고 그 자리를 돈이 대신하는 사회란 천박하다.

예의와 가치관의 문제



흔히 젊은 사람들이 기성세대와 대화를 하다 보면, 아래와 같은 이야기를 반드시 듣게 된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예의가 없어~ 예의가 중요한데 말이야."
어쩌면 이 말이 사실일 수도 있다. 예의는 다른 것보다 중요하다. 그런데, 예의가 중요하지만 지금 시대에 사람들이 예의를 지키지 않는다면, 거기에는 뭔가 합리적인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함이 자연스럽다. 왜 그런지 한번 살펴보자.

과거 사회, 한국이 전근대 농경 사회에서 벗어나지 얼마 되지 않은 시대에는 예의가 정말 중요하였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는데, 하나는 모두의 교육 수준이 낮았고 전국에서 먹고 살기 위해 서울로 사람이 몰려 와서 그 사람을 평가할 수 있는 보편적인(자본-지향적이거나 지역-지향적이지 않은) 기준이 부재하였으며, 그리고 근대 사회로 진입하면서 여러 충돌하는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새로운 질서를 수립할 필요가 있었다. 이러한 의미에 한정하였을 때 예의는 사회를 재조직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문제였다. 에티켓을 지키지 않을 경우 서로 다른 성질의 사람을 관리하고 통합할 가능성이 없으며, 이는 군사 독재 시절의 군사-국가사회주의와 결합하여 새로운 "시민"을 양성하는 데 실패하는 결과를 불러 오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예의를 지키는 사람에게 설령 사회의 모든 재화와 권력, 지위를 준다고 하더라도 이는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80년대에 취직에 성공한 사람들의 학점, 스펙, 영어 실력을 보더라도 그들은 아무 것도 가진 게 없었다. 아무 것도 가진 게 없었지만 선후배 관계를 통해 배운 "예의"는 그들을 기업에 취직하게 만들고, 정년제는 평생 직장을 보장하였다. 그러나 현대로 오면 상황은 달라지게 된다. 이제 대학생은 높은 학점과 고스펙, 높은 토익 점수가 없으면 취직이 불가능하다. 뉴스에서는 재산을 물려 받은 건물주가 몇 억을 벌었다는 이야기를 진지하게 다루며, 공무원/공기업 공채에서 윗 사람과 잘 아는 누군가가 특채로 뽑혔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여기에서 우리가 잘 아는 "예의"가 개입할 수 있는 지점이 전혀 없음은 물론이다.

한 마디로 예의는 이제 더 이상 밥을 먹여주지 않는다. 예의가 있다고 해서 대기업에 취직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예의가 없다고 해서 하루 아침에 사회에서 쫓겨나는 것도 아니다. 사회의 가치관이 변하였기 때문에 청년들이 거기에 적응하는 것도 자연스럽다. 인간은 사회에서 다른 인간과 항상 트레이드를 하는데, 만약 어떤 사람이 "난 네 예의를 사지 않을 거야(Absolutely, I won't but your manner)"라고 말한다면, 아무도 사지 않는 상품을 누가 만들까? 사지 않는다! 고 말하면 당연히 아무도 그 물건을 만들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청년이 예의가 없는 이유는 우리 사회의 예의라는 상품이 더 이상 매력적이지 않기 때문이지,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다. 예의로 모든 것을 얻는다면, 적어도 그러한 보장이 존재한다면 지금과 달리 청년은 무형의 예의를 갖추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단지, 모든 인류가 잘 아는 것처럼, 현대 한국 사회는 예의를 필요로 하지 않을 뿐이다.

서사와 인정

지난 달에 나는 박권일이 쓴 글을 읽었다. 박권일은 글에서 이런 맛깔난 묘사를 한다.
요즘 ‘고시 합격기’ 독서에 빠졌다. <다시 태어난다 해도 이 길을>, <어머니 아직 촛불을 끌 때가 아닙니다>, <정의의 월계관이 나를 기다리고>…. 사법시험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으나 내가 보기에 여전히 한국은 ‘고시의 나라’다. 읽을수록 확신이 든다. 근대 한국인의 정신적 동력을 이만큼 곡진한 민중서사로 풀어낸 텍스트는 드물다. ‘사시폐인’, ‘고시낭인’ 같은 말이 보여주듯 고시를 준비하다 망가진 사람들이 지나치게 많다. 왜 그렇게 많은 이들이 위험부담이 큰 길을 택했을까? 단순히 ‘입신출세욕’ 같은 단어로 이를 모두 설명할 수는 없다. 고시광풍의 배경엔 그런 것보다 훨씬 음울한 무언가가 자리하고 있다. 합격기에는 모종의 공통된 정서와 인식이 드러난다. 바로 억울함(resentment)과 몰사회성이다. 
그리고 박권일은 고시 수기를 분석함으로써 사회 현상에 대한 분석까지 나아간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글을 쓰지 않은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의 이름은 김선수였다.
저 글의 주인공은 최근 대법관 후보로 오르내리는 김선수 변호사다. 고시 합격기에서 독보적으로 빛나던 성찰적 지성은, 늘 사회적 약자의 편에 섰던 그의 삶으로 오롯이 증명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권일은 다음과 같이 지적함으로써, 한 개인의 독특성이 사회 자체를 바꾸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답은 명료하다. 한국 사회가 오랫동안 ‘개천용’ 타령을 하며 대다수의 존엄을 일상적으로 짓밟는 체제였기 때문이다. ‘개천용’이라는 말이 성행하는 사회는 극소수 ‘용’에게 특권을 몰아주는 사회이며, 노력의 동기가 탁월성의 추구에 있는 게 아니라 멸시의 공포에 있는 사회다. 그런 사회에서 인간은 대체로 함께 참담해져 버리는 것이다. 
박권일의 말은 틀릴 수 없을 정도로 옳다. 개천용 서사는 소수에게 특권을 몰아줌으로써 대다수의 존엄을 짓밟으며 묵살한다. 위와 같은 사회에서 인간이 참담해지기를 피하기란 불가능하다. 셰익스피어가 “Hell is empty and all the devils are here” (지옥은 비어 있으며 모든 악마는 여기에 있다) 라고 말할 때, 그가 현재의 한국을 보고 읊었는지 착각할 정도다.

한편으로 나는 TV 방송에서 이런저런 오락과 함께 정치인 후보들의 면면을 본다. 오락 프로그램에서는 과거에 유명했지만 이제는 예능인이 된 스포츠 스타가 나오고, 종편 프로에서는 변호사였지만 이제는 재판장이 아니라 카메라 너머의 대중을 향해 현란하게 말하는 변호사가 있다. 이들은 모두 과거에 무엇무엇을 했다는 훈장을 가지고 연예계에 입성한 것이다.

정치인 후보의 모습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이들 중에서는 하버드 대학을 졸업한 사람도 있고, 이런저런 직책을 그만두고 정치의 세계에 뛰어든 사람이 있으며, 그저 유명하기 때문에 당선 가능성이 높은 단체장의 후보도 있다. 유권자들이 투표장에서 “뽑을 사람이 없다”고 한숨을 내쉬는 것도 쉽게 이해가 된다.

예능이 정치가 되고 역으로 정치가 예능이 되는 일도 심각한 일이지만, 그보다 더 심각해 보이는 일은 직함이 있기 때문에 그 사람을 평가하고 인정하게 되는, 한 편의 거대한 이야기다. 대중이 선거 기간을 제외하면 정치의 문제에 큰 관심이 없다는 점을 이용해서 이들은 활개를 친다. 현실 정치의 문제가 심각하다고 모두가 한 마디씩 거들지만, 박권일이 묘사하듯 “노력의 동기가 탁월성의 추구에 있는 게 아니라 멸시의 공포에 있는 사회”에서, 진정으로 탁월한 사람을 만나기란 어려운 일이다.

1 2 3 4 5 6 7 8 9 10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