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를 맞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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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일이 되었다. 올해는 저도 다른 사람들이 하는 것처럼 방명록을 만들겠습니다. 혹시 제게 전할 말이 있거나, 용건이 있거나, 아니면 일을 부탁할 경우는, 이 글 밑에 댓글을 달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라인(lerisia)으로도 연락 가능합니다.

올해 목표: 학회 참석하기, 지면에 중편 이상의 소설을 발표하기. 야마노우에 호텔에서 숙박하기. and also...

오늘의 음악: 오리사카 유타 「헤이세이平成」, 오자와 켄지 「굳센 기분 그리고 사랑強い気持ち・強い愛」 (자막은 魔法的 버전)





근황


프랜시스 베이컨, 교황 연작 중에서



0. 북극 한파가 나를 죽이려고 한 손에 칼을 들고, 다른 한 손에는 얼음 방패를 들고 빠른 걸음으로 쫓아오는 것만 같은, 잔인하고 무자비한 추위다.

1. 최근에 불면증에 대한 해결책으로 ASMR를 애용하고 있다. 주로 듣는 채널은 타카쿠라 무키 누나, 사이온지 메아리 누나, 이에나가 무기 동생, 그리고 기타 채널들이 애청 대상이다. ASMR이 뭔지, 효과가 있는지 같은 것들을 이야기하려면 한도 끝도 없을 테니 간략하게 요약하자면, 바이노럴 마이크를 이용해서 소리를 밀도 있게 녹음한 뒤에, 그 소리를 청자가 이어폰이나 헤드폰을 통해 들으면서 전체적인 느낌을 즐기는 영상이나 녹음을 말한다. 왜 불면증에 ASMR이 듣는지, 과학적으로 밝혀진 바는 없다. 그러나 처음 ASMR를 듣게 되면 머릿속에서 간지러운 느낌이 퍼지는 묘한 느낌을 받을 수 있는데, 어떤 식으로든 뇌의 신경에 영향을 주지 않을까라고 모두가 생각하고 있다. 난 ASMR에 너무나 익숙해진 터라 이제는 들어도 그런 간지러운 느낌이 덜하지만, 만약 처음 듣는 사람이라면 굉장히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되리라고 예상한다.

2. 왠지 한국에서 화제가 되고 있는 보헤미안 랩소디를 보았다. 감상은 왓챠에 적을 생각이다만, 한 가지 생각한 지점은 프레디 머큐리가 밴드를 가족이라고 생각하면서 중간에 밴드를 배신하는 장면이었다. 왜? 결국 배신은 실패하고, 프레디는 퀸으로 돌아온다. 실패할 거면 배신하지 않는 게 나을 것이다. 이 말을 역으로 하면, 만약 성공할 자신이 있다면 배신하는 게 낫다는 말이다. 정말 그런가? 나는 예전까지는 배신하는 게 나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생각이 다르다. 스승이든 친구든 가족이든, 일단 배신하고 나면 그 후로 보이는 세계가 달라진다. 내가 배신하지 않았다면 볼 일이 없는/보지 않았을 세계를 본다는 건 좋은 일이다. 헤겔이 (가족의 뜻에 반하여) 신학을 배신하고 철학에 뛰어들지 않았다면 정신현상학대논리학, 역사철학 강의는 세상에 나타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헤겔의 말을 상기한다. "여기에 장미가 있다. 여기서 춤추어라." 우리는 춤추어야 할 존재들이지, 피안을 넘어가야 할 존재는 아니다.

3. 이름과 필연을 다시 읽고 싶다. 세미나를 하고 싶은데, 사람을 어떻게 모아야 할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는다. 세월은 가고, 사람들은 각자의 길을 간다. 그 사실에 유감은 없을지라도 쓸쓸함을 느낀다. 내가 사랑해 마지않는 포스탈코에서 미츠비시 연필과 콜라보한 새 볼펜이 나와서, 메리 크리스마스 선물을 스스로에게 줄까 고민하고 있다. 예수가 태어난 날에 가장 어울리는 성물은 평생을 함께 할 수 있을 필기구가 아닐까? 블로그의 독자 여러분도 추운 겨울 잘 나고, 행복한 크리스마스(이브)가 되기를 바란다.

용서

만약 신이 없다면 사랑, 죄, 용서 같은 말들은 돌연 의미를 잃게 된다. 왜냐면 그 말들은 단순한 언어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신이 있어야 그 말들이 의미를 가질 수 있고, 제대로, 오해 없이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선택은 두 가지다. 신의 세계에서 사랑과 용서와 화해와 믿음을 받아들일 것인가, 아니면 신 없는 세계에서 끊임없이 투쟁하며 살아갈 것인가. 그렇다고 해서 신을 믿는 일이 그리 간단하지는 않다. 신을 믿기 위해서는 목숨을 건 도약(salto mortale)이 필요하다. 내가 모든 것을 얻기 위해서는, 일단 나 자신을 판돈으로 걸지 않으면 안 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마이조 오타로, 『私はあなたの瞳の林檎』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레 19:18)


표제작인 <私はあなたの瞳の林檎>를 읽으면서 어떤 의심에도 빠지지 않았다고 말한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그러나 소설의 마지막 장면에서 링고가 울면서 "나를 귀여워만 하는 네 사랑의 방식은 좋지 않다"고 말할 때, 이 소설이 품고 있던 모든 미스터리가 해소되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다. 정녕 그렇다. 한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할 때는, 그(녀)의 좋은 점 뿐만 아니라 받아들일 수 없는 모든 나쁜 점들도 함께 받아들이고, 그리고 모든 사랑스럽고 매력적인 속성을 초월한 그(녀)의 존재 자체에게 사랑을 바쳐야만 한다. "You are the apple of my eye"라고 할지라도, 내 눈 속의 사랑이 선악과일 수도 있다고, 그런 마음가짐이 아니라면 사랑은 오래 이어지지 않는다고 단언할 수 있다. 난 마이조 오타로가 정말 천재적이라고 생각했다. 마지막 소설, 「僕が乗るべき遠くの列車」(내가 타야 하는 먼 곳의 열차)를 읽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이 단편은 마이조 오타로가 소설을 출판하면서 카키오로시(단행본을 위해 새로 글을 쓰는 행위, 또는 그 글)로 한 자 한 자 찍어낸 글이다. 사실 이게 새로운 방식도 아니고, 아마 '연애'와 '가족'으로 테마를 엮으면서 새 소설을 쓰기로 편집자와 함께 결정했을 거다. 내게 새로운 점은 소설이 전혀 새로운 이야기를 하고 있으면서, 동시에 마이조 오타로가 어떤 사상의 외피로부터 벗어나고 있다는 점이었다. 비유하자면, 내가 알고 지내던 30대 정도의 성숙한, 지적인 여성이 40대로 접어들면서 기존의 지식으로 자신을 감싸고 있던 습관, 지식의 외피라고 말할 수 있는 뭔가를 벗어던지고 갑자기 새로운 모습으로 내 앞에 나타난 것이다. 난 현실에서 비슷한 여성을 본 적이 유감스럽게도 없고,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다만 마이조 오타로라는 복면 소설가가 마침 그러한 예로 내 앞에 나타났다는 사실이, 정말이지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신비로웠다. 연기, 흙 혹은 먹이에서 단테의 신곡을 인용하면서 장광설을 뿜어 내던 시로의 모습은 어디로 간 걸까? 삶, 의미, 죽음은 어디로 간 것일까. 난 도저히 실마리를 찾을 수 없었다.

성경을 읽으면서 내가 마주치게 된 말들도 그러한 미스터리에 걸맞은 것이었다. 예수는 왼쪽 뺨을 맞으면 오른쪽 뺨도 내 주라고 말하고,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말한다. 그리고 네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라고 주문하기도 한다. 예수님의 주문은 토끼입니까? 하아하아 내가 타야 하는 먼 곳의 열차에서 주인공은 두 명의 여자와 마주친다. 한 명은 그를 사랑하지만 내색조차 하지 않으면서 고백도 안 하고, 다른 한 명은 사랑하면서 잠재적인 경쟁 상대인 다른 여자를 신경쓰기도 하고, 자신의 꿈을 고백하기도 한다. 꿈의 내용은 이렇다. 미야자와 켄지의 "은하철도의 밤"처럼 하늘 높이 올라가는 열차에 사람들이 앉아 있다. 여주인공은 혼자 앉아 있는데, 그 옆으로 주인공이 다가온다. 그리고 열차에 같이 앉으면서 이렇게 말한다. "내가 같이 있을 테니까." 그녀는 열차에서 혼자 있던 터라 불안하기도 하고 무서웠는데, 그가 열차의 옆자리에 같이 앉으면서 비로소 안심하게 되었다고 대답한다. 주인공은 고백을 듣고 놀라운 기분에 빠진다. 둘은 키스한다.

그리고 얼마 후, 주인공이 열차에 타는 꿈을 꾼다. 그녀는 사실인지 거짓인지 알 수 없는 고백을 하고, 주인공은 잠에서 깨어나 그녀의 집에 전화를 건다. 그리고 새벽에 둘은 대화를 나누고, 이게 정녕 둘이 만난 건지 아닌지 알 수는 없지만, 주인공은 꿈의 내용을 말하지 않는다. 여기까지만 보면 중학생 시절의 사랑 이야기 혹은 추억 정도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마지막 장면이 가까워지면서 주인공은 원래 자신을 사랑하던 여자로부터 비보를 듣는다. 자신에게 꿈을 고백한 그 여자아이가 자동차 사고로 사망했다는 소식이었다. 그리고 더 놀랍게도 여자는 고백한다. "와 사귀고 싶다고. 중학생 시절부터 너를 좋아해 왔고, 그 마음이 계속 이어져 왔지만 일부러 고백하지 않고 대학생이 될 때까지 기다렸다"고. 죽음과 함께 사랑이 시작되는가? 아니면... 주인공은 일단 고백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둘은 사귀지 않고, 친구의 장례식에 간다. 장례식장에서 둘은 진지하게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아직 확실하지 않지만 미래는 두 사람 앞에 펼쳐져 있다. 내 열차는 그 열차가 아니었다. 내가 타야 할 열차는, 꿈 속에서 보았던 그 열차가 아니라 다른 열차라는 점은 확실하지만, 먼 곳에 있다. 나는 그 열차에 타야만 한다고 자각하면서 소설은 끝난다.

내가 자신을 사랑하듯이 이웃을 사랑하라는 예수의 말은 규범인가, 아니면 흄의 말처럼 동정심의 육화에 불과한가? 만약 규범이라면 우리는 이웃을 사랑해야만 한다.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은 보편타당한 규칙이다. 하지만, 흄의 말처럼 이웃에 대한 사랑이 동정심의 발현이라면 그러한 규칙은 존재하지 않는다. 어디까지나 내 생각에 불과하지만 마이조 오타로는 후자에서 전자로 이행하는 것처럼 보인다. 단편오망성이나 모두 씩씩해 같은 과거 단편집에서 마이조 오타로는 감정에 의해 움직이는, 그러나 도덕적인 주인공을 그려 왔다. 내가 누구를 돕든 상관 없이 도움에는 감정이 개입하며, 이 감정은 동정심일 수도 있지만 증오일 수도 있고, 여러 가지 원천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마지막 단편「僕が乗るべき遠くの列車」에서는 그런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나는 꿈에서 그녀의 곁에 앉는데, 왜냐면 앉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야 하기 때문에 하는 일이지 그렇게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이 아니다. 그녀가 죽고 나서도 나는 '열차'의 의무에 대해 자각적인데, 그 이유는 우리 삶은 열차를 갈아 타면서 누군가의 곁에 앉는 일의 총체이기 때문일 것이다. 마이조 오타로는 다름이 아니라 바로 진리를 말하고자 했다고, 나는 소설을 읽은 지 한 달이 지나서야 깨달았다.

믿음은 맹목적이다. 믿거나 믿지 않거나, 둘 중 하나다. 내가 믿기 시작하는 그 순간부터 세계가 전혀 다르게 보이고, 모든 사물은 전혀 다른 의미를 부여받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다면 세계는 원래 있던 그대로이다. 마이조 오타로는 믿음의, 믿음 뒤의 세계를 택한다. <호냐라라 샐러드>에서 말하는 것처럼, "먼저 자기 자신을 믿지 않는다면, 타인을 믿을 수 없는 것이다." 이 말을 마지막 소설에 정확히 대응시키자면, 바로 이러하리라.

"먼저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이웃을 사랑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게 윤리의 본모습이라고, 어쩌면 사랑의 본모습일지도 모른다고, 작가는 소설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2018. 12.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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