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를 맞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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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일이 되었다. 올해는 저도 다른 사람들이 하는 것처럼 방명록을 만들겠습니다. 혹시 제게 전할 말이 있거나, 용건이 있거나, 아니면 일을 부탁할 경우는, 이 글 밑에 댓글을 달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라인(lerisia)으로도 연락 가능합니다.

올해 목표: 학회 참석하기, 지면에 중편 이상의 소설을 발표하기. 야마노우에 호텔에서 숙박하기. and also...

오늘의 음악: 헤쿠토파스칼(헤쿠와 파스칼) 「Break These Chain」, 범프 오브 치킨 「천체관측」 feat. 카시코마리(かしこまり)




8.14.

Existential Comics(@existentialcoms)의 아래 만화에 감명을 받아서 쓴 잡감.



사실 전기 비트겐슈타인의 아이디어는 Kantian View의 일종(아종)으로 볼 수 있기에, 전기 비트겐슈타인을 반박하게 되면 그는 칸티언 뷰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수정된 칸티언 뷰를 받아들일 수는 있겠지만, 원론적이고 근본적인 의미에서 그는 칸트주의자가 아니다. (사실 다수 철학자가 그렇다) 문제는 후기 비트겐슈타인이 과연 반형이상학자인가? 라는 것인데, 셀라스-브랜덤 뷰에 따르면 비트겐슈타인이 "탐구"에서 하려는 일은 norm-governed practice의 본성을 밝히는 일이다. 그런데 브랜덤 식으로 해석하면 비트겐슈타인은 material reasoning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반형이상학적이다.

셀라스 식으로 해석하더라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라이트와 크립키 식으로 해석하면 비트겐슈타인은 norm에 대한 natural-pattern(regularity)의 우선성을 주장하기 때문에, 형이상학적이다. 문제는 이 두 가지 해석이 모두 "탐구"에 대한 꿈보다 해몽 식의 그럴 듯한 해석이라는 점이다. "탐구"에 대한 가장 적절한 해석은 맥도웰이 "Wittgenstein on Rule Following"이라는 논문(1988, Synthese)으로 제시한 침묵주의적인 해석이다.

문제는 침묵주의라는 뜻 자체는 (적당히 말하자면) 철학에 대한 것이 아니라 철학활동에 대한 것이라서, 여전히 비트겐슈타인이 형이상학자인지는 모른다. 전기 이전에 비트겐슈타인이 적었던 노트, 유고 등을 참고하면 비트겐슈타인이 윤리적이거나 미적인 사태에 대해 가진 입장은 "사적이다." 이 말의 뜻이란 윤리나 미적 행위에 대한 언어 게임 내에서 통용 가능한 해석이란 존재하지 않되, 개인의 레벨에서 그 행위는 의미있으며 또한 존중받아야 한다. 물론, 이러한 입장을 조금 더 정교화하면 로티 식의 교화적 상대주의가 될 수도 있지만 로티가 제시하는 "아이러니"라는 개념이 과연 후기 비트겐슈타인이 의도하였던 윤리적이거나 미적인 사태에 대한 침묵주의와 같은 함의를 가지는지, 아니면 양자는 다른 함축에서부터 출발한 건지는 아직 모른다.

이 두 개의 개념이 비슷해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먼저 로티의 irony라는 개념에 대해서 간략하게 설명하자. 로티의 아이러니는 인간 "삶의 의미(meaning of life)"를 설명하는 최종 어휘를 갖지 않는, 즉 생전에는 도달하지 않으리라는 일종의 태도이자 믿음인데 사실, 비트겐슈타인이 윤리적이거나 미적인 사태에 대해 말하는 구절도 비슷한 울림을 갖는다. 왜냐면 비트겐슈타인이 말하는 '윤리적 태도'는 마치 "창살에 머리를 박는 일과 같은" (케임브리지 윤리학 강의) 것으로 현실에서 윤리적으로 행위한다고 해서, 답을 구할 수 있는 태도가 아니다. 답은 로티의 용어법에서 최종 어휘에 대응하기 때문에, 윤리적 태도에 대한 존중은 결국에 아이러니라는 개념과 이어지는 점이 있다.

그러나 개념을 둘러싼 사태는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니다.

8. 6.

그런데 자본금이 한 1000억 원만 있으면 대학교를 설립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선생들은 재야에서 일하는 분들과 시간강사 분들을 모으면 되니까 그것도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학교 설립에서 가장 큰 문제는 바로 학생들을 모으는 일인데, 기본적으로 강사들에게 최저임금 수준의 월급을 주기 위해서는 매년 200명 가량의 학생을 모집해야만 한다. 한국에서 인문 대학의 수요가 그렇게 많지 않기 때문에 이를 위해서는 학사학위를 반드시 줘야만 할 것이다.

인간(들)과 유의미한 대화를 하려고 노력하면서 대마초를 피우는 모습을 구경하고 싶다. 내셔널 램푼을 만든 편집장은 30대 중반의 어린 나이로 자살했다. 그를 기억하는 영화까지 만들어져서 넷플릭스에서 볼 수 있지만, 문제는, 비인간적이면서 멸시적인 대학 생활이 그 자체만으로 찬양받는다는 사실이다.

「소셜 네트워크」는 성공한 사업가인 마크 주커버그가 자신의 과거를 되돌아보는 이야기인가, 그렇지 않으면 한 인간인 주커버그가 인생에서 실패하는 과정을 묘사하는 이야기인가? 그는 인생에서 실패하지 않을 수 있었지만, 하버드 속에서의 경험은 그를 인생의 실패자이자 최고의 찐따로 만들었다. 마크 주커버그는 자기 인생에서 이렇게 실패했다고 데이빗 핀처는 소셜 네트워크를 통해서 더없이 훌륭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하지만, 주커버그의 실패는 그가 하버드 대학에 들어갔다는 사실에 있다. 만약 그가 MIT나 스탠포드에 들어갔다면 지금처럼 영화 하나로 조롱당하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대학의 목표는 아름답고도 정의로운 한 공동체를 일구어 내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하버드의 fraternity 문화는 아름답지도 않고, 정의롭지도 않으며 자유롭지도 않다. 마사 너스바움은 처음으로 하버드 주니어 펠로를 받은 여성이었다. 그녀는 심지어 이런 말까지 듣게 된다. “옛날 그리스 시대에 히파티아라는 ‘창녀’가 있었다. 하버드에서 마사 너스바움에게 펠로쉽을 주는 것도 그와 비슷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트위터에서 분노하기 전에 생각해 봐야만 한다. 선망하는 그 “대학들”, 아이비 리그가 불과 40년 전만 하더라도 얼마나 여성 차별적이었는지를 말이다.

2시간 31분의 다이내믹스 - 더 스퀘어 감상


영화 더 스퀘어는 스톡홀름 역과 그 주변에서 구걸하는 다양한 거지들의 모습을 비추며 시작합니다. 그리고 더 스퀘어(the square)라는 제목이 문자 그대로 말하는 작은 사각형의 공간, 즉 미술관 바로 앞에 설치된 가로세로 2미터의 평면 공간은, 화면 속에서 거듭해 나타나는 거지의 공간과는 철저히 분리되어 있습니다.

영화의 주인공인 크리스티안은 스웨덴 왕족 궁전을 개조한 미술관의 수석 큐레이터로 일하고 있습니다. 현대 미술에 대한 지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익숙하겠지만, 개념 미술과 설치 미술이 영화 속에서 중요하게 묘사되고 있습니다. 이야기로 돌아와서, 그는 ‘더 스퀘어’란 이름의 설치 작품—과 그에 수반하는 전시—을 홍보하기 위해 홍보 대행사를 고용하는데요, 이들이 유튜브에서 대형 사고를 치면서 크리스티안의 인생과 직업도 점점 혼돈으로 물들게 됩니다.

크리스티안은 출근길에 핸드폰과 지갑, 소중한 커프스—나중에 범인이 훔쳐간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물건—를 잃어버리고 미술관에서 핸드폰을 찾습니다. 그는 이민자인 부하와 함께 한 가지 계획을 짜는데요, 핸드폰이 도착한 곳으로 가서 우체통에 협박 편지를집어넣는다는 것입니다. 이 계획은 나중에 성공적으로 크리스티안의 지갑과 핸드폰을 찾아오지만, 스웨덴 꼬마가 편지의 내용을 이유로 거세게 항의를 하면서 새로운 골치 아픈 문제를 불러옵니다. 처음에 크리스티안의 부하가 소년을 달래 보려 하지만, 이 당돌한 꼬마는 “크리스티안이라는 놈의 집에 가서 깽판을 놓겠다”며 되려 협박합니다. 이제 이 문제는 단순한 해프닝이 아니라, 소년과 그 사이에서 해결해야만 하는 중요한 문제로 부상합니다.

한 가지 언급하고 싶은 장면이 있습니다. 바로 저녁식사 신인데요, 여기서 등장하는 인간-고릴라는 ‘정글’ 속에서 자신보다 약한 상대를 찾아서 테이블을 배회하는 동물입니다. 크리스티안은 인간-고릴라가 한 남자를 멋지게 쫓아낸 뒤에 멋진 퍼포먼스였다며 박수를 치지만 인간-고릴라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계속 사냥감을 찾아나섭니다.

이윽고 인간-고릴라는 의자에 앉은 여성에게 접근합니다. 인간의 탈을 쓰고 있지만 고릴라처럼 행동하는 이 동물은, 여성의 머리를 만지다가 갑자기 돌변하여서 머리채를 잡고 그를 끌어내립니다. 그러자 모든 남자가 달려들어서 이 동물을 제압하기 위해 각자의 주먹을 날리고, 인간-고릴라는 남자들의 주먹에 항복을 외칩니다. 그리고 스크린은 거지가 비를 피해서 비닐을 쓰고 자는 모습을 비춥니다.

언뜻 보면 그저 웃음을 유발하기 위해 만들어진 장면 같습니다. 하지만 인간-고릴라가 여성을 잡아 끄는 모습은 매우 폭력적입니다. 그리고 폭력에는 폭력으로 응수하듯 모든 사람이 달려들죠. 이 영화의 주제가 위선과 위선자에 대한 풍자와 반성에 있다면, 인간-고릴라라는 퍼포먼스의 위선을 제압하는 사람들의 선의를 보여주기 위함이 아닐까요?

지금 현재 스웨덴을 포함한 유럽에서는 난민 문제가 부상하고 있습니다. <더 스퀘어>는 스웨덴에 사는 거지가 크리스티안을 돕는 장면과 소년과 같은 아파트에 사는 할아버지가 그를 돕는 장면을 통하여 타자의 선의를 받아들이는 사회를 제시하는 듯 보입니다. 크리스티안이 딸들에게 “코펜하겐에서 아이의 목에 이름표를 달고 거리에 내 보냈다”고 말하는 장면은 의미심장합니다. 모두가 타인의 조건 없는 선의를 믿지 못하는 차가운 시대에, 감독은 자신의 위선을 돌아봄과 동시에 타인에 대한 믿음을 되살리는 방법을 관객에게 다시 제시합니다. 이미 광장(square)은 주어져 있으므로, 선택은 영화를 관람하고 나서는 관객에게 맡겨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환기는 일견 쓸모 없어 보이는 현대미술이 사회를 향해 발신하는, 하나의 중요한 역할이기도 할 것입니다.

(2018. 8.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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